
Hikari & mate
森重 優那
이 이야기는 두 가지 결말을 갖고 있습니다.
어느 에필로그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나뉩니다.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6화
"손님이 왔는데, 술은 없나요?"
"오늘은 술 안 사 와서 없어."
선배는 대신 물을 가져왔다. 완벽한 맨정신으로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괜찮다. 우리는 술을 마시지 않아도 늘 취한 것처럼 행동할 수 있었다. 누가 들으면 괴팍하다고 생각할지 모르는 언어들을 만담처럼 늘어놓는다. 그런 재미없는 농담들을 할 때는 오히려 용기가 솟아나서 이야기가 이야기를 낳고, 꼬리의 꼬리를 문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기묘한 밤이 시작됐다.
“선배는 무뚝뚝한 사람인 줄 알았어요.”
“언제?”
“처음 만났을 때요.”
“이상하다. 내가 먼저 말 걸었잖아.”
“그러게요.. 사실은 선배가 너무 아는 척을 해서 뭐지 싶었어요.” 혀를 쑥 내밀었다.
“mean girl. 첫인상이랑 완전 달라.”
“제 첫인상이 뭔데요.”
“좋은 게 좋은 사람. 남들이 하자는 건 다 네네, 하고 쉽게 들어주는 사람.”
“그거 욕하는 거죠.”
“칭찬은 아니지.”
선배! 하고 손을 들어 살짝 어깨를 밀었다. 윽, 하고 공격받는 척을 해준다.
“그런데 봐, 하나도 안 지잖아.”
“그것도 욕이죠.”
“아냐, 아냐. 이건 칭찬이야. 강단 있다니까, 특대생쨩은. 똑 부러지고 아무한테도 안 져. 외유내강인가?”
살짝 흘기듯 묻는 내 눈빛을 무시하고 선배는 아냐, 외강내강인가, 힘도 센데. 하며 또 다시 농담을 걸어온다.
“그래서 싫어요?”
“아니, 좋아.”
그 좋다가 다른 좋다인 걸 알면서도 두근대는 자신이 있다. 이대로 또 혼자 설레버린다. 왠지 복잡한 기분이 들어서 조금 심술궂게 말했다.
“여자아이니까 상냥할 거야, 그렇게 생각했겠죠. 그런데 생각보다 잘 안 져주니까 다들 당황한 거예요.”
“뭐, 유일한 여학생이긴 했다.”
“전 그거 싫었어요.”
“알 거 같아. 편리한 대로 규정하고 판단하는 거. 여자니, 천재니, 이런 수식어.”
“맞아요. 나는 그냥 나 자신인데, 그건 보려고 안 하죠.”
“that’s lovely. 꽤나 좋은 말을 하네, 특대생쨩.”
“그러니까 그런 거요. 특대생, 그런 수식어.”
사실은 특대생 같은 호칭이야 어쨌든 lovely, 라는 말에는 숨 막히는 거라구요. 그러니까 그만, 같은 말은 할 수가 없었다.
“헤에, 예전엔 완곡하게 거절하는 타입이었는데.”
“그래서 싫으냐구요.”
“좋아해.”
나는 그런 거 좋아해.
내 자신이 단호한 타입이기도 하고, 덧붙이며 기지개를 펴는 선배를 지긋이 응시한다. 마음속에 옅은 불이 피어나는 기분이다. 마음이 간질간질해진다.
좋아해, 당신을 좋아해__ 다른 의미의 좋아해, 가 몇 번이고 가슴을 울렸다.
들키지 않으려면 말을 돌려야 한다.
"내 첫인상이 왜 그랬을까요.”
“글쎄, 왜일까.”
학원을 구한다고 나타났으니까? 선배는 나직하게 반문했다. 장난 같은 말을 하면서 꽤나 진지한 모습이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내용과 말투가 따로따로 어긋나서 희극 같아 보이기까지 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랑 유포리아는 한 편의 희극이었다.
아마네 히카리라는 광대가 발랄한 청춘을 연기하는.
“그때의 상냥했던 아마네 히카리가 진짜일까요?”
“말장난 같네. 히카리는 빛, 유우나는 상냥함.”
“선배, 듣고 있어요?”
“듣고 있어. ‘빛’과 ‘상냥함’, 잘 어울리잖아.”
선배가 풀썩 소리가 나도록 소파에 등을 묻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내 쪽을 올려다본다. 그 눈빛에는 다정함이 어려있었다.
“우리는, 너랑 나는. 태연하게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문드러지는 사람들이라는 거야.”
깍지 낀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눈을 감았다 뜨는 선배를 빤히 바라보았다. 티가 안 나서 가식적으로 보이는 사람. 취했던 그 날 밤 선배는 곧잘 그런 말을 듣는다고 했다.
가슴이 저미는 말이다. 티가 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티를 내지 않는 것일 뿐이다.
“난 지금은 좀 알 거 같아. 그게 꼭 나쁜 건 아니라고. 살다 보면 그래. 상처받아도 아닌 척 해야 할 때가 있고, 싫어도 고개를 끄덕여야 할 때가 있어. 그건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본능일 거야.”
선배가 웃었다.
“그거 합리화예요?” 나도 웃었다.
“아냐, 자기방어야. 그러니까 가식이 아니야.”
나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가식이 아니야,” 선배가 한 번 더 힘을 줘서 강조했다.
“자신의 기분보다 타인의 기분을 더 신경 쓴다는 방증이야. 모두를 위하고 싶어서 다 들어줬던 거야. 배려가 깊었던 거지, 너는. 진짜로 상냥한 사람이야.”
나는 위로받고 있었다.
갈라진 마음에 따스함이 스며든다. 그 말이 선배 자신에게도 들린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타인에게는 관대한 사람이 자신에게는 엄격한 경우가 있다. 그러다가 과거의 자아를 내버려두고 마는 것이다. 떨고 있는 어린 시절의 모리시게 유우나에게, 저 따뜻한 위로가 닿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럼 선배도 사람들이 원하는 건 다 들어주니까 상냥한 사람.”
“누구한테나 그런 거 아냐. 나 단호하다니까.”
내 앞에서는 네 뜻대로,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
반박하고 싶은 마음을 넣어둔다. 사실 거짓말이라도 믿어 줄 참이다. 다른 사람에겐 단호하고, 나에게만 무른 모리시게 유우나__ 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미소가 스민다.
잔뜩 낡은 옷감마냥 빛바랜 단어들을 그러모아 기워낸 문장도 이 사람과 나누면 빛이 난다. 그것은 결코 말의 힘이 아니다. 그 말을 전하는 사람의 힘이다.
"지금 이 순간도 '진짜'를 억누르고 자신을 꾸며내는 건 아닐까 걱정돼?"
"아뇨. 전혀요."
"그래, 지금 정말 좋거든. 넌 애초에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어. 지금 보여주는 모습 그대로 모두에게 사랑받을 테니까."
상처에 약을 바르는 것만이 방법은 아니다. 그것을 건들지 않고 지켜봐 줄 사람이 필요했다. 자연스럽게 회복되도록 시간을 들여서. 덧나지 않도록 세심하게 주의해서. 새로운 상처가 나지 않도록 옆에 두고.
선배는 그렇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다. 5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소파에 파묻혔던 선배가 비스듬히 가로누웠다. 풀썩하는 소리가 났다. 넓은 소파였지만 팔이 닿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움찔하지 않았다. 선배와 닿는 것이 당연한 전개처럼 보였다.
"히카리.”
“왜요.”
“나 방금 이름으로 불렀는데.”
“네, 유우나 군.”
“와, 여유. 캐릭터가 이렇게나 달라지다니.” 유우나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캐릭터 그만 돌아오면 좋겠어요?”
다 선배한테 배운 건데, 하고 나도 웃었다. 소파에 누워 흐트러진 그의 머리칼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선배는 분명 특대생이란 수식어가 싫다는 내 말을 기억하고 ‘이름’을 불러 준 것이다. 당황해서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도 제대로 들어 둔 것이리라.
상냥한 사람.
“아니, 어떤 모습이든 좋아. 히카리는 히카리야.”
히카리, 빛.. 하고 그가 중얼거렸다.
마지막엔 거의 울음소리 같이 들려서, 나는 귀를 기울였다.
이 기묘함은 또 다른 희극이다.
오늘도 밤은 어둡다. 각자의 짐을 지고 끝없이 헤매인다.
왜 우리 집에 오자고 했어? 그는 묻지 않는다. 사귀자고 안 해요? 나는 묻지 않는다. 애초에 왜 우리 집에서 재워달라고 했어? 그는 역시 묻지 않는다. 애초에 왜 갑자기 연락했어요? 나도 역시 묻지 않는다. 정말 다시 연락, 안 하는 거야? 서로 묻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이다. 설명이 필요할 때는 요점만 말하고, 시도때도 없이 쓸데없는 농담이나 늘어놓다가, 정작 필요할 때는 입을 다문다. 영원히 맞닿지 않는 평행선을 위를 따라 멀어지는 사람들이다. 기대가 어긋날까 봐 겁을 잔뜩 집어먹고서, 상처라도 날새라 그저 지켜보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분명 그런 방식으로밖에 위로받지 못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Les miserable (레미제라블, 불쌍한 사람들이여)
우리는 둘 다 이 순간을 소중하게 지키고 싶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혹여라도 깨질세라, 조심스레 그러안고서. 부딪치는 일 따위 없도록 그저 지켜보고 또 지켜본다.
나는 친구에게 안전한 곳에 있고 자고 들어갈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
창 너머로 동이 틀 무렵, 유우나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히카리, 같이 살자.”
유우나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이상하게 열기가 오른 그는 마치 술에 취한 것 같았다.
“제 방은 있어요?”
어차피 잠투정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서 나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내 방 쓸래? 나 여기서 잘게.”
“아, 괜찮아요.”
이 소파 제 침대잖아요. 그렇게 대답하니 유우나가 느릿느릿 웃었다. 봐, 우리 통하잖아, 날, 잘 안다니까, 잘 통해서, 정말 그런 농담이, 좋아, 너의. 띄엄띄엄 두서없이 말하는 유우나는 정말로 졸린 것 같았다. 그의 머리가 무겁게 떨어져서 내 쪽으로 한층 더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 봤어?" 그가 거실 한구석의 포스터를 가리켰다.
"아뇨.”
"그럼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는 봤어?"
"못 봤어요. 유우나 군, 여전히 영화 좋아하는구나."
"좋아하지. 여행이 끝나고 돌아가면 둘 다 보도록 해."
"왜요?"
그의 머리카락이 살랑거리며 목을 간질였다. 어느새 완전히 내 어깨에 기대어 있었다.
"그 영화를 보면 우리가 생각나거든.”
"그렇군요."
나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갑자기 졸린 척을 하며 눈을 감았다. 분명 '노팅힐'같은 영화일 것이다. 사랑을 무기 삼아 속 편하게 도망이나 가고 말았답니다, 하고.
선배는 나를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비겁한 겁쟁이. 사랑을 핑계로 그늘에 숨어든 사람. 그런 내가 떠오른다는 영화 같은 것을 볼 수 있을 리가 없다.
한심한 생각을 하기 싫어서 영화 제목들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잠을 자는 것이 좋겠다. 오늘은 너무 많이 걸어서 조금 지쳐있었고, 잠이 들면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힘을 빼고 소파에 몸을 늘어뜨리자 머리가 유우나 쪽으로 기울었다. 뺨에 그의 보드라운 머릿결이 닿았다. 내 어깨에 기댄 그에게 다시 기대어 그렇게 사이좋게 서로를 지지해준다.
유우나가 고개를 드는 기척이 느껴졌다. 누워서 자, 하고 그가 말했다. 기시감이 든다고 생각하면 이내 조심조심 몸을 옮기는 느낌이 들었다. 온 몸에 전달되는 감촉은 푹신하다.
소파에 누워서, 머리에 베고 있는 것은 그의 무릎이리라. 눈을 감고 있어도 그의 눈이 상냥함으로 빛날 것을 안다. 그가 가만가만 내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하는 것이 느껴졌다.
"너는 특별해.”
아주 따뜻했다. 언젠가, 선배와 함께 내 방에서 단 둘이 새해를 보냈지. 그 날 잠결에 느꼈던 손길처럼, 그립고 부드러웠다. 이대로 따스함에 몸을 맡기면 정말로 졸음의 물결이 밀려올 것만 같아서, 나는 힘을 모아 입을 열었다. 점차 눈앞이 희미해져 갔다.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뭐라고요,"
파도에 몸을 맡기진 않으리라.
도망가는 나를, 그는 언제까지 지켜봐 줄까.
"As tave milieu."
유우나가 귓가에 속삭였다.
도망가지 않는 그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들었다.
—
잠이 들어서 행복했다. 깨어 있었다면 나는 분명히 울었을 것이다.
이 밤이 가는 것이 서러워, 또 다시 혼자 남겨지는 것이 외로워,
펑펑 눈물을 흘렸겠지.
밤은 무겁다. 과거가 한층 더 또렷하게 어깨를 짓누른다. 그 무게를 어찌할 바 몰라서 가느다란 빛이라도 들기를 기다린다. 드디어 전래 동화의 동앗줄처럼 한 줄기 빛이 내려오면, 유우나와 나는 그것을 타고 간신히 올라간다. 과거가 호랑이처럼 사납게 달려오는 것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돌린다.
그러나 죽을 만큼 달려온 이 곳에서조차 검은 파도가 넘실거린다는 사실을 이내 깨닫고, 절망한다. 도망간 곳에 천국은 없는 것이다.
결국엔, 별빛도 없는 어둠의 한가운데서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다. 돌풍이 호시탐탐 우리의 조각배를 집어삼키려 하고, 유우나와 나는 두려움에 떨게 될 것이다.
그것을 지켜보던 유우나가 나지막히 말한다.
너는 빛이야.
하지만 내 손을 잡지는 않는다.
무대로 돌아간 그는 분명히 빛나고 있을 텐데.
반짝거리는 사람이 빛을 잡기 두려워한다는 건 슬픈 아이러니다.
거기까지 다다르면 꼭 오기가 생기고 마는 것이다.
나도 그의 손을 잡지 않는다. 바다에 뛰어들어 홀로 헤엄치기 시작한다. 그와 함께 이 뗏목위에 있는 한, 우리가 맞이할 결말은 과거의 바다에서 익사하는 것 뿐이니까.
시간이 흐르면 다 해결될 거야.
그때까지만 도망가 있자.
그렇게 5년이 흐르고, 또 앞으로 얼마나.
깨달으면 늦어 있다.
—
일어났을 때, 유우나는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먹은 것도 없잖아요.”
“그러게. 이상하게 설거지거리는 항상 있더라고.”
“배 안고파요?”
“아, 어제 장 봐온 거 있어. 냉동실에.”
“인스턴트 콩이랑 옥수수요?”
“봐, 너무 잘 알아.”
왠지 절망스러워서 한숨을 내쉬었다.
“컵라면이라도 사올걸.”
게으르게 소파에 다시 몸을 던졌다. 해는 이미 중천이다. 거실 창으로 스며드는 빛에 유우나의 등이 눈부셨다. 왠지 나른하고 노곤한 기분이 들고, 소파는 푹신거려서 좋았다.
“이 소파 가져가고 싶다.”
“보내줄까?”
“어떻게요. 우리 집 주소 모르잖아요.”
“참, 그렇지.”
주소 가르쳐줄까요, 같은 말은 하지 않는다. 선배도 주소 뭔데, 라고 묻지 않는다. 다시는 연락하지 말자고 했다. 이미 뱉은 말은 돌이킬 수 없다. 취소할게요, 라고 편리하게 번복해도 그 말을 내뱉은 순간이 사라지진 않는다.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네 선택이니까 존중할게. 유우나는 어차피 그런 생각일 것이다. 핸드폰이 너무 빛나서 겁이 나는 사람이니까 또 먼저 연락해주는 일도 없을 테다. 내가 먼저 연락하거나 파리에서 우연히 만나기 전에는.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 한 구석이 시려왔다. 이제 이곳을 떠나면 나에게 유우나의 전화번호를 누를 수 있는 용기는 남아있지 않을 것임이 틀림없었다. 런던에 와서 유우나를 만나고, 그에게 전화하고, 그와 함께 지내는 데 이미 다 써버린 것이다.
우연이 아니고서는, 우리는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라고.
다시는. 이렇게 감정적이고 운명론적인 단어는 좋아하지도 믿지도 않는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비수로 꽂혀서 그게 무슨 의미인지 수없이 곱씹게 된다.
다시는 유우나를 만날 수 없을 거야. 가슴이 저리도록 깨닫는다.
“처음에는 그거 살 줄 몰랐어.”
“딱 봐도 유우나 군 취향은 아니에요.”
“응, 내 취향은 아닌데,”
유우나가 물기를 터는 소리가 들렸다. 복잡한 마음이 누그러졌다.
“한 번 앉아보니까 못 일어나겠더라.”
“아, 알 것 같아요 그 기분.”
“세상엔 막상 겪고 나니 좋아지는 것도 있네.”
첫눈엔 모르는 거야, 하며 그가 냉동고 문을 열었다. 부스럭거리는 게 콩과 옥수수를 꺼내는 것 같았다.
“사랑도 그래. 처음엔 이 사람이 좋아질 거라고 상상도 못 하는데. 깨달으면 이미 빠져있는 거야.”
“그거 전 여자친구 얘기에요?”
나는 정색했다.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아서 이윽고 그가 자이언트 옥수수 봉투를 뜯는 것을 발견하고 말았다. 솔직히 두려운 기분이다.
“아니, 아닌데.”
“그럼 누군데요.”
벌써부터 입 안에 종이 맛이 가득한 것 같았다.
“첫사랑.”
“전 여자친구가 첫사랑 아니에요?”
“응, 아냐. 차였어. 만날 첫사랑 얘기만 한다고.”
유우나가 물을 올리는 것을 바라보다가 벌떡 일어났다. 저것들을 삶는 것을 보고 있느니 내가 직접 볶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뭐야, 앉아있지. 네 침대에.”
“종이를 먹을 수는 없잖아요. 간장은 있죠?”
“있는데, 안 궁금해? 첫사랑 얘기.”
“안 궁금해요.”
“헤에,”
선배는 소파에 앉아있는 게 도움될 거 같아요. 단호히 말하면 유우나는 다소 실망한 표정으로 터덜터덜 소파로 돌아갔다. 일부러 슬리퍼 소리를 내는 것을 보면 무진 티를 내고 싶은 모양이었다. 평온한 행복이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 같이 노래를 불렀던 그 날처럼.
He’s lovely. (사랑스러운 사람.)
Yet adorable. (‘사랑’스러운 사람이여.)
“유우나 군.”
“응.”
“제 첫사랑은 진짜 짓궂은 사람이었어요.”
보글보글 콩이 끓는다. 익었는지 하나 입에 넣어보고 나도 모르게 앗 뜨거, 소리를 낸다.
“내가 할게.”
“괜찮아요. 불은 안 낼게요.”
“첫사랑을 생각해서 그런 거야?”
어느새 그가 등 뒤에 와 있었다. 괜히 거슬린다. 당신이 있기 때문에 실수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이제 다시는 이 기분을 느끼기 전으로는 돌아갈 수가 없다. 그것을 깨달으면 또 한번 무력해진다.
“좋은 생각이 있어. 히카리 첫사랑과 내 첫사랑 이야기를 교환할까?”
“와, 좋아요!”
하고 휙 뒤를 돌면 여전히 유우나가 알짱거리고 있다. 눈이 마주치자 기쁜 듯이 웃는다.
유우나와 나는 서로의 주위를 도는 작은 위성이다. 궤적을 따라, 몇억 광년이 지나도 서둘러 다시 멀어진다. 가까이 다가가면 이카로스의 날개처럼 처연하게 녹아내리리라. 언제까지고 거리를 두는 편이 영원히 지켜볼 수 있다. 그림자 속에 숨어서, 그렇게라도 반짝반짝하려고 애를 쓴다.
“...라고 할 줄 알았죠.”
“변했어. 예전엔 뭐 교환하자고 하면 고맙습니다, 하고 귀여웠는데.”
“캐릭터가 바뀌어서요.”
그래서 싫어요? 하고 물으면 유우나는 또 lovely, 라고 대답한다. 이미 익숙해진 풍경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눈가가 시큰거리는 것을 참으려고 일부러 다 됐다, 그렇게 큰소리를 치면 어느덧 거실에 빛이 가득 들어차 있다.
고작 콩과 옥수수에 이런 저런 조미료를 넣어 볶았을 뿐이지만, 소중한 식사라고 생각한다. 소파 앞에 대충 테이블을 끌어다가 놓고, 멋은 조금도 없다. 모리시게 유우나와 아마네 히카리처럼.
“최후의 만찬이네.”
“볶은 종이 맛 나는 최후의 만찬. 눈물 나요.”
“런던까지 왔는데 이런 거나 먹이고 미안하네.”
“무대 뒤를 알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약속. 파리에선 맛있는 것 사줄게.”
“미슐랭 3스타로요?”
“아아, 그래. 지금부터 예약해 둬야지.”
그와 나의 마지막 만찬은 종이 맛이나 나는 엷은 것이 아무리 무거운 주제라도 3류 극장에서나 다를 법한 가벼운 만담투성이라서 어쩌면 참 우리다웠다. 사랑스럽다, 그의 미소처럼.
—
그가 리버풀 역까지 데려다주고 싶다고 말했다.
오늘은 내가 결정하는 날이니까, 하고 말해서 대꾸할 수도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 건지, 아니면 하나도 없는 건지. 마지막이라는 것을 예감하면 그 무게에 압도당해서 아무 말을 하지 못하고 만다. 그래서 입을 다문 채로 걷는다. 원래 걸음이 빠른 사람들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천천히, 천천히. 함께 있는 순간을 조금이라도 연장하고 싶을 것이다.
어제의 튤립 공원도 지나쳐 결국 어느 벤치에 도착했을 때, 나는 소리 없이 앉았다. 유우나가 그런 내 앞에 섰다.
"늦지 않겠어요?"
"아직 조금 여유 있어."
"늦으면 어떡해요. 얼른 가요."
"빨리 가면 좋겠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유우나도 재차 묻지 않았다.
"안아봐도 돼?"
그의 말이 먼 꿈처럼 들렸다.
"네(no). 안 돼요."
"굿바이 허그 같은 건데.”
"유우나 군 런던 사람 다 됐다."
"히카리, 화났어?"
"아뇨."
화를 내는 것이 아니었다. 어딘가 침착할 수가 없을 뿐이다. 고개를 들지 않고 발끝만 바라보았다. 의식해서 몸에 힘을 주지 않으면 덜덜 떨 것 같았다. 오늘은 선배가 굿바이, 안녕이라는 단어를 꺼냈다..
정말로 헤어짐이 왔다.
어제 내가 부린 변덕같은 용기로 아주 조금 유보할 수 있었을 뿐, 역시 여기가 끝인 것이다. 새파랗게 엄숙한 현실이 덮쳐왔다. 만에라도 하나, 지금 내가 화를 내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그저 필사적인 저항일 뿐이다. 현실을 직시하기 싫은 어린아이의 투정이다.
__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다시 상기해봐도, 나는 모른다. 이런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조금도 모른다. 지금까지 계속 끝을 말한 건 그가 아니라 나였으므로.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겠다는 쓸데없는 자존심인지, 오기를 부리는 방법밖엔 생각나지 않는다.
어쩌면 체념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그의 옷자락을 부여잡아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키스를 해도 개구리가 공주님이 되는 마법은 없었다는 것을, 비참하도록 체감하게 되면 어쩌지. 그 압도적인 두려움에 짓눌려서, 나는 끝까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유우나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볼 수 없었다.
그는 다정하게도 굳이 묻지 않았다. 그런 나를 탓하지도 않았다. 그저 말없이 허리를 숙였다. 내 앞머리를 쓸어올리고, 이마에 키스했다.
런던 사람처럼,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 과정이 슬로우모션 같았다.
"안녕 (Good bye)."
이마에서 입을 뗀 유우나가 천천히 고했다.
나는 여전히 발끝만 응시하며 유우나의 마지막 인사에 답하지 않았다. 그래, 자존심도 오기도 아니었다. 여기서 고개를 들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면 말이 헛나올 것을 직감하고 있는 것이다. '안녕'이라고 대답하려 입을 여는 순간 그를 붙들고 유우나 군, 나랑 사귀어요! 하는 무책임한 말을 대신 뱉어버릴 것이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나는 계속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얼마나 내 대답을 기다렸는지 땅 위에 비친 유우나의 그림자가 돌아섰다. 그것이 시야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쿨'한 런던 가이니까, 마지막까지 이렇게 세련된 인사를 남기고, 그는 아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먼저 단호하게 일어나지 않으면 이 상황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대로라면, 리버풀 역의 튤립공원처럼 ‘안녕’이라는 말만 수 천번을 주고 받으면서 서로가 붙잡아 주는 기적을 욕심내게 된다.
이제 오후 두 시인데 눈이 부셨다.
그는 내가 왜 마지막 포옹을 거절했는지 알까. 왜 몇 번이고 안녕을 말했는지 알까. 헤어짐도 만남도 전부 같은 단어라는 걸 알게 될까. 작별의 안녕(good bye)이 아니라 또 다른 만남을 바랐던 안녕(hello)이라고, 파리에서 말해주게 될까.
그 때는, 더 이상 도망가지 않을 수 있을까.
햇살이 따가웠다. 그냥 아무렇게나 던진 말이었는데 정말로 햇빛 알레르기가 생길 것만 같았다.
점점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졌다.
나는 앉았을 때처럼 소리 없이 벤치에서 일어났다.
모리시게 유우나의 뮤지컬을 보겠다는 계획을 머리에서 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