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森重 優那

 

Heaven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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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튤립 잔향이 코를 간질였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열두 시의 마법이 풀렸다. 

 

선배를 곯려주고 싶었을 뿐인데.

이런 일을 상상한 것이 아니었다. 

생각했던 것과 다른 상황에 당황해서, 나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묻고 싶은 말은 산처럼 쌓여 있지만 가능한 당황하고 있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 선배, 안 피해요?"

"응, 그러고 싶지 않았으니까."

"왜요?"

 

선배는 대답이 없었다. 

위잉 하고 전등의 불빛이 깜빡이는 소리만 조용하게 울려 퍼졌다. 

입술에는 여전히 선배의 온기가 남아 있는데, 얼굴의 핏기가 싹 가시는 기분이 들었다. 

왜 선배는 말이 없는 걸까.

 

 

“저, 선배와 뭘 한 걸까요?"

"..."

 

 

 

__ 키스, 했잖아요.

 

 

 

말을 하지 않으면 모른다구요 선배. 

초조함과 답답함 때문에 질문이 멈추지 않았다. 

조급한 마음을 눌러 줄 냉정 따위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져버렸다. 선배와 키스하던 그 순간, 혹은 선배가 당연하다는 듯이 내 어깨를 감싸오던 그 순간에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렸을 것이다.

 

나는 착각했음이 틀림없다. 어쩌면 고작 키스 한 번으로, 나는 5년의 공백이 조금이나마 메워졌다고 멋대로 믿고 싶었던 것일지 모른다.

 

"선배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요. 고등학교 후배?"

"그냥 후배와 키스하진 않아."

“...그럼, 왜 했어요?"

“...”

 

돌아오는 대답은 역시 없었다. 가만히 있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가슴 속이 꼬여서 아파오는 것 같다.

방금 전까지 가득 피어올랐던 튤립 향기가 모두 가라앉아 버렸다.

 

우리가 무슨 사이냐니. 세상에 그런 질문이 어디있어. 왜냐하면, 우리에겐 무슨 사이라고 할 것도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정확히는 일 년에 한 두 번 연락하는 이노리를 통해서나 생사를 확인할 수 있는 그런 사이였다. 오로지 공백, 거리, 갭 같은 것만이 존재하는 사이.

 

내가 물어봐 놓고도 우스워.

하지만 더욱 비참한 것은, 그럼에도 질문을 멈출 수 없는 자신이었다.

__ 나는 항상 선배가 궁금했으니까. 

나와 같은 선배에게 묻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았다. 편입생으로서, 상처를 가진 사람들로서, 전직한 사람들로서. 우리는 언제나 다르지만 같은 곳에 서 있었다. 

__ 하지만 그는 나의 거울 같은 사람.

나와 꼭 같아서, 그에게서 나를 보게 된다. 선배에게 묻는 순간 거울 속의 자신을 반추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살아왔던 과거를 돌아봐야만 한다. 그의 대답은 그 다음 문제다.

 

선배를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이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묻고 싶은 게 쌓여있어도 정작 중요한 것들은 물어볼 수 없었다. 나는 아직 과거를 돌아 볼 준비도, 과거에서 벗어날 준비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5년이나 잘 참았는데, 겨우 만나게 되고 나선 쓸데없는 질문만 잔뜩 해댔다. 분해서 다시 눈물이 나올 것만 같다.

 

여기서 또 울면 이번에야말로 선배를 곤란하게 만들게 되는데 신체란 왜 자기 멋대로일까. 의지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입술을 깨물고 차오르려는 뜨거운 것을 애써 밀어 넣었다. 고개를 숙이고 눈을 깜빡거리면 비로소 선배의 말이 울렸다. 그 시간이 너무도 길게 느껴졌다.

 

"우리, 만날 수 있었던 시간보다 만나지 못했던 시간이 더 길었어.”

선배는 또박또박 말했다. 

 

“이제 겨우 다시 만났는데,”

고르고 또 골라서, 정제된 언어를 고민했을 것이다. 선배라면 그랬을 것이다. 

 

"나는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있고, 너는 곧 여길 떠나.”

속이 쓰렸다. 선배가 잠시 말을 멈췄다. 이 사람은 쓸데없이 신중하다.

 

"내가 성공했을 때 옆에 있는 게 너였으면 좋겠는데...”

 

결국 이 순간이 오고 말았다.

내 상상 속에서 선배는 항상 ‘냉담’했다. 보고 싶다거나, 선배가 궁금했다거나, 그렇게 물어봐도 아, 그래? 하는 무덤덤한 모습을 보게 되면 어쩌나. 각오하고 있어도 파괴력이 엄청나서 온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러고 나면 연락 같은 것을 하고 싶은 생각이 깨끗이 사라졌다. 어떻게 지내는가 따위는 몰라도 좋으니까, 나를 밀어내는 모습만 보지 않으면 그것으로 족했다. 

 

그리고, 지금 그것을 보고 있다.

 

멍하니 선배가 말한 문장을 다시 곱씹었다. 그것이 영어였는지, 리투아니아어였는지, 몇 번을 생각해봐도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언어는, 어떻게 해석하는 거지. 그래서 선배는 결국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에둘러 거절하는 건가. 성공했을 때라는 건 어떤 의미일까. ‘지금’은 아니라는 건가. 

 

 

선배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결정적인 말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너를 좋아하니까, 당연한 거잖아. 그런 말은 결코 해 주지 않는다. 

 

 

알고 있다. 저리도록 알고 있다.

결정 따위는 못 해서 서로에게 미루기만 하는 두 사람이다.

애써 내 쪽으로 생각을 전환했다. 그래, 생각해 봐. 만일 선배가 지금 당장 나와 만나자,고 말했다면 나는 바로 대답할 수 있었을까.

 

그렇게 이해할수록 엄중한 사실이 엄습했다. 우리는 이렇게나 결정할 수가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 오로지 상대가 말해주기를 바란다. 어쩌면, 상대가 기껏 말해준다 해도, 여전히 다른 핑계를 찾으며 스스로 멀어지겠지. 쉽게 말하기엔 공백은 크고, 마음은 깊었다. 불안감은 이내 망설임이 된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결국은 두려움에 밀려 선 밖으로 한 발 물러나고 만다. 

 

"미안, 설명을 제대로 못 했나.. 어느 부분을 모르겠어?”

“그것도 잘 모르겠어요.."

 

 

우리, 사귀어요?

 

 

이 한 마디가 너무나 무겁다. 그래서 영원히 그의 핑계를 대고 싶어진다. 

‘히카리(빛)’가 사라진 자취나 되짚어가는 건 겨우 여기까지 다다른 선배에게도 가여운 일이라고. 반짝임을 잃은 빛은 누구도 비추지 못하니까, 기껏 무대로 돌아간 선배마저 퇴색되고 말 거라고. 그렇게나 선택을 못 하는 사람이 애써 마음먹은 일인데 불쌍하게도!

선배에게 부담이 되기 싫은 거야. 나 도망가는 거 아니야. 그냥 선배에게 짐이 되기 싫은 거야. 듣는 이 없는 변명을 이어간다.

__아니, 이건 선배가, 확실하게 대답해주지 않으니까 나로선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어. 변명은 그의 탓으로 귀결된다.

 

이렇게라도 나아가려는 자신이 비참했다. 갈기갈기 바스러졌다. 

이제는 수용치의 한계에 도달해서 머리도 가슴도 터져버릴 것 같다. 

 

문득 생각났다. 선배가 도망가도 괜찮아, 라고 말한 것이.

슬프지만 인정해야 했다. 나는 도망가고 싶은 것이다. 지긋지긋하다고 말해놓고 막상 이런 처지에 놓이게 되니 그 방법이 너무나 안락하게 느껴진다. 어쩔 도리가 없다. 도망가는 순간은 여행과 같아서, 나를 짓누르는 무게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성우를 그만두고 이 자리에 오기까지 나는 열심히 발버둥쳤다. 포기하고, 과거의 조각 같은 것은 이제 간신히 찾아볼 수 있을 만큼 겨우 괜찮아졌다. 그런 노력은 아무 소용도 없다는 듯 선배가 거울을 깨고 나온다. 해일처럼 몰아친다.

 

거대한 파도 속에서 나는 다시 길을 잃고 만다. 작은 뗏목의 부러진 노를 붙잡고 파도에 휩쓸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릴 것 같다. 그럴 수는 없다. 이제야 겨우 괜찮아진 것 아니었어?

 

__ 아니었다. 나는 아직 선배를 만나도 괜찮지 않았다.

런던 같은 데에 와서 함부로 만났으면 안 됐다.

선배와 가장 가까워졌을 때에야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닫고 만다.

 

그를 만나지 못했던 기간은 하루하루가 위태로운 나날이었음을. 삶이 살얼음을 밟는 것 같았음을. 하지만 애써 밀어 넣고 모른 척 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살아가지 않을 수 없으니까. 그래서 하필 지금 알게 되었을 때 더 절망적인 것이다. 5년간 억눌렀던 마음이 뒤늦게 울컥울컥 올라왔다. 

 

감정의 극한에 다다르고 나면, 이 순간을 조금도 견딜 수가 없게 되었다.

꼭 두려움이 사라지고 반발심이 고개를 들었다.

 

대상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일단은 저항하려 애쓰게 된다. 패자의 마지막 몸부림이다. 단단히 꼬여서, 오기심에 지배되어서, 부조리함에 대항하고 싶어진다. 이런 때에 하는 말이란 원하는 것과 정반대이다. 

 

“있잖아요, 우리 연락하지 않았던 때로 돌아가요. 앞으로도 서로 어디에 있는지, 뭘 하고 있는지 묻지 말아요. 그러다가 파리에서 우연히 만날 수도 있어요."

"진심이야?”

“네.”

“나 그동안 네가 어떻게 지냈는지 전혀 몰라. 묻고 싶고 듣고 싶은 게 많아.”

 

선배가 잠시 뜸을 들였다. 바로 말을 잇지 못하는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런 것은 조금도 생각할 여유가 없다. 스포트라이트에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은 무대 위에서, 대사는 조금도 생각해내지 못해서, 줄이 끊어진 목각 인형처럼 멋대로 움직인다. 

 

“..계속 연락하고 지내면 우리가 어떤 사이인지도 알게 될 거야...”

“하지만 선배도 동의했잖아요. 인연을 시험해보자고."

 

통제할 수단도 사라진 목각인형은 거침없이 연기할 수 있었다. 그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 8시간의 시차를 두고 핸드폰 너머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전등인지 달빛인지 모를 불빛이 여기까지 닿지 않고 물러갔다. 깜빡깜빡, 꺼질 것만 같았다. 

 

"파리는 넓고 우린 거기 가 본 적도 없어. 정식 단원이 되지 못하면 애초에 갈 수도 없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날 수 있다면 그게 인연이겠죠."

 

떨쳐내려는 듯이 단언했다. 어쩌면 고집을 부리는 것일지 몰랐다. 그 대상이 나 자신인지 선배인지는 여전히 모른다. 단지, 잔뜩 움츠리고 뭉개져도 마지막 힘을 내서 전력으로 질주한다. 정확히 반대방향으로. 달리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선배는 대답이 없었다. 내 기세에 눌린 듯 미소도 띄지 못하는 선배와는 달리, 끝을 말하는 나는 믿을 수 없이 차분했다. 도망가는 순간은 항상 이랬다. 학교를 떠나기로 한 순간에도 그랬다.

 

"안녕히 계세요.(bye)"

 

누군가 먼저 일어나지 않으면 이 밤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멀리서 전등불이 다시 돌았다. 이쪽을 향했다 멀어져, 선배와 나 사이에 거리를 만든다. 사방으로 갈가리 찢겨서 다시 수 갈래 길이다.

 

선배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단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아주 무거운 시계추처럼, 느리게 느리게 흔들었다. 이대로는 백 번을 '안녕' 이라고 말해도 이곳을 떠나지 못한다. 

 

솔직히 말해, 이 순간까지 나는 기대했던 것이다.

도망가겠다고 엄포를 놓으면 붙잡아 주지 않을까, 하고. 마지막 날 밤 그랬듯이 ‘옆에 있어, 가지 마’라고 말해줄 지 모른다고. 그런 파렴치한 희망이 내 안에 도사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니다.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술에 취했거나 아니면 꿈이었거나. 그러니까 현실의 선배가 결정해주는 것은 차라리 기적에 가까울 것이다. 내가 결정하는 것이 기적이듯이. 

 

숨을 크게 들이 마시고 모자와, 안개꽃 다발, 다이아몬드 세븐 카드를 쥐었다.

"진짜 안녕이에요.(good bye)"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제법 큰 소리로 말했다

의연하게 돌아서는 모습을 보이고 싶어서, 그대로 성큼성큼 걸었다.

이번에야말로 나는 말 그대로 '도망쳤다'. 

 

 

선배는 나를 끝까지 붙잡지 않았다. 

동반도주라느니, 다시 주워 온다느니. 역시 전부 꿈에 불과했다.

 

 

나는 선배를 좋아한다.

 

아주 오래전부터.

 

 

 

 

 

 

선배를 좋아한다.

 

그것을 처음 깨달았을 때, 내 삶은 무지갯빛이었다. 무대에서도, 녹음 중에도, 배역에 비춘 나의 미래를 보았다. 어디에나 나의 세상이 있었다. 그것이 드넓게 펼쳐진 우주 같아서 별처럼 빛날 수 있었다.

 

신데렐라의 미래는 눈부셨다.

그때는 몰랐다.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이다지 어려운 것인 줄을 몰랐다. 선택이란 건 차라리 꿈에 가까운 것이었음을, 그리고 꿈이라는 것이 그리도 대단한 줄을, 그때는 미처 몰랐다. 

 

마침내 세상의 박수 위에 섰을 때 깨달았다. 마법처럼 등장한 신데렐라는 열두시가 지나자 재투성이로 돌아가 버렸다. 그랑 유포리아의 막이 내리고, 호박 마차가 사라지고, 유리구두를 잃어버리고, 나는 변변한 레귤러 하나 없이 오디션을 전전했다.

 

세계는 딱히 나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두 번 다시 신데렐라를 위한 무도회는 열리지 않고, 현실 위에 지을 수 있는 성은 더 이상 없다.

 

실패의 경험이 계속되면 사람은 더 이상 선택할 수도 결정할 수도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력해져서, 겁에 질려 도망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된다. 

 

불쌍하게도. 

 

 

 

어느 선배가 좋았다. 

좋아했는데, '강렬하다 못해 숨도 쉬지 못하는' 무대로 돌아갔다. 

 

선배는 도망을 간 것일까. 아니면 꿈을 꾸는 것일까. 시리도록 궁금해서 여행을 떠나고 서점을 뒤져도 반짝이는 삶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무도한 현실로부터 도망가는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좌절한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빛나고 싶다.

금세 바스러지는 허공의 샛별일지언정, 비추고 싶다. 

그러니까 언젠가는 런던에 선배의 무대를 보러 가야지.

나 자신에게 하는 시험 같고 어쩌면 이제는 괜찮다는 증명 같은, 무모하고 깜찍한 계획.

 

마음속 깊이 잠가 둔 과거의 영광이 그리웠을지도 몰랐다. 오래된 유물도 다시 닦으면 반짝반짝해질 거라고, 그런 착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숨이 턱에 닿을 때까지 도망와 놓고도 뒤를 돌아보는 거겠지. 이미 오래 전에 퇴색된 과거의 빛을 빌려서라도, 다시 반짝거리며 살고 싶어서. 

 

__ 아니다. 사실은 그저 선배가 보고 싶었다. 그 사람이 있는 런던에 가서 그 사람의 무대를 혼자만, 몰래 보고 올 속셈이었다. 패기 좋게 휴학을 하고, 과거의 나를 찾아 떠난다느니, 꿈을 찾는 여행을 하겠다느니 같은 것은 허울 좋은 변명이다. 나는 그저 런던에 갈 핑계가 필요했다. 

 

그렇게 찬란함이 그리워 돌아보면 한 때는 에우리디케였을 차가운 돌이 서 있다. 

반짝이는 나도 없고, 선배도 없다. 

 

나는 틀렸다. 

혼자이다. 

외롭다.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뒤엎고 다시 뒤엎기를 반복하며 런던의 거리를 쏘다녔다. 혼자 걷는 런던은 어둡고 쓸쓸해서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리버풀 역을 지나, 뱅크 역을 또 지나, 모뉴먼트 역까지 이르렀을 때 나는 다리의 힘이 풀리고 말았다. 

 

결국 모뉴먼트, 또다시 여기로 오고 말았다. 

 

 

 

 

 

 

6시. 

 

모뉴먼트 역과 연결된 런던브릿지에 기대어 섰다. 

물밀듯이 퇴근하는 사람들이 회귀하는 연어떼처럼 한 방향으로 향했다. 난간에 기대어 그들과 반대 방향을 바라보았다. 높은 건물들이 사람들을 토해내는 것만 같았다.

 

일방통행 속에서 홀로 역방향. 어쩌면 항상 내가 원했던 인생의 모습일지 몰랐다.

아니다, 나는 휩쓸리고 싶지 않은 것뿐이다.

파도에 휩쓸리면 저 멀리 모르는 곳 어딘가에서 __

 

 

 

"안녕."

 

 

 

__ 희미하게 들려오는 목소리는 다정하다. 

멀리 빌딩들을 응시하던 시선을 천천히 눈앞으로 옮겼다. 

 

 

나는 앞에 누가 서 있을지 알고 있었다. 

한동안은 미동도 않은 채 그렇게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선배도, 나도. 

 

바삐 퇴근하는 사람들의 행렬은 여전히 무심하게 반대방향으로 우리를 지나쳐갔다. 다리 위에서 선배와 나의 시간만 멈춰 있었다. 그 시간이 참 길게 느껴졌다. 이 장면이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의 마지막 씬 같다는 바보 같은 생각이 든 순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선배도 따라 웃었다.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선배도 나도 그저 웃기만 했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나였다.

 

"저인 줄 어떻게 알았어요?”

"멀리서 봤을 때는 설마 했어."

"저는 선배를 못 봤는데."

"그럴 것 같았어. 시선이 멀리 있었잖아.”

 

침묵이 이어졌다.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막기 위해 어떤 말이든 해야 했다. 

그것이 또 다시 바보같고 쓸데없는 질문일지라도.

 

"왜 인사했어요?"

"그냥 네가 거기 있으니까. 해야 할 것 같았어."

"인사 다 했잖아요."

"그럼 이제 가라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선배는 가벼운 캐쥬얼에 내가 아는 원래의 안경을 썼다. 한 손에는 책이, 한 손에는 장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오늘은 왜 수트가 아닐까. 그날은 왜 아끼는 안경을 쓰고 나온 거지. 내가 찬찬히 뜯어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선배가 멋쩍은 듯 설명을 시작했다.

 

"집에 먹을 게 다 떨어져서 뭐 조금 산 거야. 이 책은 레미제라블인데, 내가 단역으로 나와서 다시 읽느라.. 그냥 모든 고전이 그렇듯이, 특대생쨩도 알겠지만. 읽을 만 하니까.."

"그렇군요."

 

그 날은 나와 만나기로 해서 차려입고 나온 거였어요? 

묻고 싶은 말은 단답이 대신했다. 

 

"응, 그렇지. 오늘은 모자 안 썼네? 햇빛 알레르기는 어쩌고."

"아, 그게.. 괜찮을 때도 있어요."

"그래? 다행이네. 그런데 말야,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네?"

"내가 런던브릿지로 퇴근한다는 것 알고 있었어?"

"아뇨. 그런 얘기한 적 없잖아요."

"그렇구나.. 그랬지. 그럼 있잖아, 봐봐."

 

선배가 한 발 앞으로 더 가까이 다가왔다.

 

"사실은 오늘 우체국에 들러서 뭘 좀 부쳐야 했거든. 그런데 왠지 지금 가면 안 될 것 같은 거야. 그래서 안 갔어. 만약 내가 우체국에 들렀다면 지금보다 더 늦게 여기 도착 했을 테고, 그땐 네가 이미 떠나 버렸을지도 몰라. 그럼 우린 못 만났겠지? 너도 내가 여길 지날 줄 알고 온 게 아니고, 나도 네가 여기 있을 줄 알고 온 게 아냐. 그러니까 우린 진짜 우연히 만난 거지, 런던브릿지에서."

 

나는 숨을 죽였다. 다음 말이 무엇일지 알 것 같았다. 

선배는 한 발 더 앞으로 다가왔다.

 

"인연이라는 건, 이런 게 아닐까?"

 

살면서 놓치면 안 될 타이밍이 있다면, 꿈을 짓고 현실을 갈아엎는 동안 이미 여러 번 놓치고 말았다. 그것이 또 있다면 바로 지금이다.

 

우리 둘은 별이다. 깜깜한 우주 속을 천천히 돌고 돈다. 그리고 지금 겨우 둘의 궤도가 만난다. 이 순간이 지나면 다시 각자의 궤적을 따라 멀어진다. 지금을 놓치면 안 된다고,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틀림없다.

놓치면 그때는 늦는다. 

 

__ 그러네요. 

이 한 마디면 되는데. 

그런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제의 일이 가슴을 에는 것 같다.

5년의 공백을 두고 어쩔 줄을 몰라 바들바들 떨던 내가 스쳐갔다.

선배와의 거리를 두고 ‘인연’처럼 거대한 단어를 말하기에 나는 너무나 초라한 존재다.

 

나는 모른다. 이런 때 어떻게 해야 좋을지, 나는 모른다.

모르는 상태로 어설프게 상황을 정리하려고 해 봤자, 최악의 결과가 기다린다는 사실을 고작 어제 배웠다. 또 다시, 어색함과 망설임 속에서 끝없이 끝없이 가라앉고 말겠지. 확신을 주지 않는 그를 앞에 두고, 영원히, 침묵의 깊은 바닥으로. 

 

그러니까 고작 용기내 할 수 있는 일은 집에서 재워달라느니, 안경을 빼앗는 장난이라느니 하는 것처럼 바보같고 충동적인 것밖에 없다. 

 

이럴 때는 일단 도망가서 시간을 버는 게 좋다. 

아냐, 도망이 아냐. 그냥 이 상황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뿐이야. 

 

“The third time's a charm. 삼세번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렇지."

"리투아니아에도 있어요?"

"그러네, 있네."

 

선배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 그럼. 첫 번째는 내가 연락했을 때 하필 네가 런던에 온 것. 5년이나 시간이 있었는데 왜 하필 그때였을까? 두 번째는 지금 여기 런던브릿지에서도 우연히 만난 것. 만일 세 번째가 있다면... 그건 파리가 되겠네."

"반대 아니에요? 제가 영국에 있을 때 선배가 연락한 거잖아요."

"그거나 그거나."

 

선배가 크게 웃었다. 성큼성큼 다가와 내 옆에 섰다. 

우리는 함께 난간에 기대어 템즈 강을 바라보았다.

 

너 때문이라는 말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의 무게에 짓눌려서, 조금도 선택할 수 없어서 자포자기하고 말 뿐이다.

 

지금 눈앞에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 있는데도 손가락 하나 들어올릴 수가 없다. 5년의 공백도, 허무하게 빛나는 핸드폰 화면도, 8시간의 시차도 모두 뛰어넘어 이렇게 내 눈 앞에 나타났는데. 기적처럼 겨우 둘의 궤도가 만났는데, 그대로 멀어지는 것을 빤히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

 

그 사실을 슬퍼할 기력조차 없다. 그저 지금은, 어딘가 아늑한 곳에서 이 밤을 무사히 보내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언젠가 볕이 들 때쯤 다시 찬찬히 생각해보고 싶다.

 

그땐 이미 늦은 것이다.

알면서도, 누구에게라도 변명처럼 말하고 싶어진다.

 

 

한참 강을 바라보던 선배가 입을 열었다.

 

"어제 네가 그렇게 '도망'가고 나서 나도 곧 집으로 돌아갔어. 버스 안 타고 걸어서. 템즈강 따라서 쭉 걷는데, 두 시간은 넘게 걸리더라. 가다가 중간에 맥주도 사서 마시면서, 수트를 입고 새벽 두 시에 술 마시면서 걸었어, 웃기지. 근데 맞은편에서 동료도 수트를 입고 술을 마시면서 걸어오는 거야. 서로 어색하게 인사하고 나니까 진짜 웃기더라고. 내 모습도 굉장히 웃겼을 거야. 차려입은 부랑자 같아서는."

"뭐야, 술은 왜 마셨어요.”

"모르겠어. 그냥 마시고 싶었어."

 

멀리 강변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을 흐리는 선배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선배의 대사는 어딘가 비현실적이었다. 그것을 너무나도 담담하게 읊는 모습이 어딘가 시공간이 다른 차원에서 옛날 동화라도 들려주는 것 같았다.

 

왜, 왜 선배는 혼자 밤길을 걸었을까.

어울리지도 않는 모습으로 술까지 마시면서.

조금은 울고 싶어졌던 것일까.

__어쩌면 무언가를 기대했던 것일까.​​

20세기 무성 영화처럼 눈앞의 장면이 현실과 살짝 어긋났다. 아주 먼 곳에서 기차의 기적 소리라도 들려오는 것 같다. 기적 소리는 천천히 이 곳을 향하다가 이윽고 맹렬히 달려오기 시작한다. 그 소리가 귓전에 닿은 순간, 새벽 티비처럼 지직거리던 선배의 모습과 지금 옆에 서 있는 선배의 얼굴이, 정확하게 겹쳐졌다.

 

나는 깨닫고 만 것이다__

 

__심술도 느긋하게 되돌려주는 이 여유로운 선배가 나만큼 괴로웠던 것일지 모른다고.

 

선배는 막연한 기대를 했으리라. 그것이 어떤 형태인지는 정확히 몰라도 어렴풋이.

보기좋게 그것을 부수어 버린 것은 나일지도 몰랐다.

눈이 부시다고 5년을 망설인 선배였다. 빛(ひかり)은 쥐는 순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버릴 거라고, 그는 제멋대로 상상했을 것이다. 간절히 원하던 것이 예상했던 대로 비참하게 흩어진다. 놓치고 싶지 않아서 겨우 잡아낸들,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만다. 그것을 무력하게 바라만 봐야 하는 것은 너무나 가혹한 일이다. 그럴 거라면 처음부터 잡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고 만다.

 

선배는 이런 불안과 망설임을 이해시킬 자신도, 끈기도 없었던 것임이 틀림없다.

5년을 연락하지 못한 것과 꼭 같은 이유로.

 

선배의 기대를 저버리진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딘가 연민이 솟아올랐다. 새하얀 연기처럼 떠오르는 기운이 나를 너그럽게 만들었다. 동시에 가슴 속에, 무엇인지 모를 불꽃이 하나 튀었다. 그것이 무력해진 내 자신에게 반기를 들고, 손가락 끝을 움직이고, 선배의 옷자락 정도는 잡을 수 있는, 그런 작은 힘이 되고 있었다.

 

그래, 선배와 나 누구를 향한 것인지,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지 그런 것 따위는 하나도 모르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도망을 가더라도 ‘지금’은 같이 있고 싶다. 이 사람과. 

 

서로의 주변만 끝없이 돌더라도 좋으니까 뭐든 사소한 이야기들을 의미없이, 시답잖게 그 소파에 함께 앉아서.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그런 순간을 바라서 여기 런던까지 왔다. 

그가 ‘지금’의 나를 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야, 이렇게나 퇴색됐다. 빛나지 못하는 게 두려워서 과거를 전부 내팽개쳐두고 도망이나 왔다. 그런데도 다시 반짝이고 싶어서, 언젠가는 돌아간다고 큰소리나 치며 과거를 기웃대는 것이다. 정말로 질리는 인간이야, 나는. 

자신의 초라함을 확인하게 될까봐 두렵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그가 그립다. 

Though it’s the abandoned heaven,

Yet beside him.

나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런던브릿지에서의 우연이 우리의 인연이라고 단언할 용기는 없지만, 최소한 이 순간을 그와 함께하는 것 정도는 겁쟁이인 나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결코 아무렇게나 하는 말이 아니었다.

 

"오늘 약속 있어요?"

"아니, 없어."

"조금 이따가 다시 만날래요? 친구한테 열쇠 전해주고 돌아올게요."

"그래, 그럼 여기서 다시 보자. 이 근처에 괜찮은 펍이 있어."

"오늘은 제가 정하는 날이었죠? 선배 집에서 봐요."

 

소파가 편해서요. 

선배가 이유를 물으면 그런 대답을 하려고 생각했다. 

 

제멋대로라고 해도 좋다. 지금까지도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지 모른다.

단지 처음으로 결정을 미루지 않았다. 

선배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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