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kari & mate
吉條 七緒
마음의 길을 잃었다.
첫사랑이었다.
마음의 길을 잃었다.
첫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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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학식에서 그녀를 처음 보았다. 20년 만의 여자 특대생. 전교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나도 그 중 하나였다. 입학 전부터 소문이 자자해서 내심 궁금하기도 했고, 분명 그래서였을 것이다. 입학식 내내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본 것은. 물론 당시 그녀는 내 존재 따위 몰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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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도 길을 잘 잃는 나는 그녀를 만나고서 더 자주 헤매게 되었다. 누군가를 담아두는 마음이란 미궁과 같았다. 나는 길치니까__ 일찌감치 나아갈 생각을 버리고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녀가 열일곱, 내가 열여섯이었다.
2학년 선배들의 이름을 부르며 허물없이 웃고 떠드는 그녀를 마주할 때면, 같은 반 친구인 나로선 채워줄 수 없는 동갑내기만의 무언가가 있는 걸까 싶어 한없이 가라앉았다. 나에게 좀 더 기대면 좋겠는데, 그렇게 말해주는 3학년 선배 앞에서 살짝 얼굴을 붉히는 그녀를 보면 잔뜩 젖은 마음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점점 그녀에게 물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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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들에 비해 딱 하나, 내가 가진 강점은 그녀와 같은 반, 같은 기숙사, 같은 층이라는 우연이었다. 단짝으로 붙어 다니다시피 하며 그녀의 사소한 습관들을 발견했다. 우유는 초코우유만 마신다든가, 하품을 할 때는 눈을 반만 감는다든가, 집중할 때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뜯는다든가 하는 소소한 행동. 목욕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입는 실내복의 색이라든가, 교실에서 잠깐 눈을 붙일 때는 벽에 기대어 잔다든가, 잠들었을 때의 표정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라든가 하는 흔치 않은 부분까지.
그런 모습들은 분명 나만 아는 것이다, 그런 우쭐함이 있었다. 그런 내가 그녀의 모든 것을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것도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참가하는 오디션에는 모두 지원했다. 같이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기적같은 능력을 발휘했다. 유닛의 일과 겹쳐 힘에 부칠 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그녀를 생각했다. 합격 축하해요! 함께 연기하게 되어서 기뻐요. 그렇게 말해주는 것을 상상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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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의 마돈나로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는 그녀였다. 누군가에게 고백받는 일이 흔했다. 칸무리와 함께 뒤따라가 망보기를 할 때면 내가 더 긴장해서 마른 침을 삼켰다. 지금은 일에 집중하고 싶어요. 끝내 거절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서야 안도의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면서도 왠지 조바심이 생겨 매일 밤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어차피 다음날 아침부터 또 볼 사이인데도. 그러면 그녀는 귀찮은 기색 하나 없이 바로바로 답장을 해 주었고, 대다수의 경우는 귀여운 수다를 떠는 것이다. 그렇게 쌓이고 쌓인 메시지들을,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치히로 상이 깨지 않도록 돌아누워 다시 찬찬히 읽곤 했다. 가슴이 벅차올라 결국엔 잠들지 못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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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감히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가 누군가를 가장 필요로 했던 순간 옆에 있어주지 못했던 원죄 때문이리라.
나에게 자격이 있는 걸까. 그녀와 오우타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볼 때면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같은 편을 들어주지 못했던 후회와 죄책감, 부러움과 질투가 뒤섞였다. 오우타가 선점한 포지션은 영원히 가질 수 없었다. 그녀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고 싶다면 감수하고 짊어져야만 할 사실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 굴레를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것을 깨달으면 미궁의 벽이 더욱 높아졌다. 한치 앞이 보이질 않았다. 칠석 소원으로 무엇을 빌었어? 이런 프로포즈를 받는다면 어때? 반 친구지만, 조금은 의식해주면 좋겠는데.. 아니, 혼잣말이야!
어느 것도 끝까지 말할 수가 없었다.
*
3학년이 되었다. 선배들과 헤어진 것은 아쉽고 쓸쓸했지만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기대도 없진 않았다. 그녀에게 남은 가장 가까운, 남자.
그럼에도 여전히 챙김받는 것은 내 쪽이었다. 느즈막히 일과가 끝나 이미 기숙사 식당이 닫아버리거나, 외부에서 일을 마치거나 하면 귀신같이 알고 같이 저녁 먹어요, 하고 말해주는 그녀였다. 내 스케쥴은 어떻게 알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가슴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비로소 그녀와 대등하게 설 수 있는 것 같아서, 점점 더 행복의 미궁 속에 빠져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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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녀가 고백을 받아주었다.
졸업식을 고작 이틀 앞둔 때였다.
그 고백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멈춰 있었다. 3년 동안 쭉 혼자였던 그녀를 옆에 두고 분명히 안심했던 것이다. 그녀가 누군가를 만날 리가 없었다. 그녀의 옆자리에는 항상 내가 있었고, 그녀는 아무리 바빠도 변함없이 웃어 주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 왔다.
교실에서든, 기숙사에서든, 레슨실에서든, 식당에서든, 내가 보이기만 하면 달려와 오늘 기분은 어떤지, 일은 잘 되어가는지 살뜰히도 물어봐 주는 사람. 대화의 끝에는 항상 키치죠 군, 이거, 하고 사탕을 몇 개씩 쥐어주었다. 손바닥 위에 놓인 사탕 꾸러미를 물끄러미 보고 있자면 먹고 힘내요, 라고.
그런 꾸준함에 안주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녀를 잃을까봐__ 라는 두려움을 핑계로 안일함을 합리화했다. 제자리를 도는 나에게, 그녀는 마치 신화 속의 아리아드네 같아서, 그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 것이다. 길을 잃지 말라고 붉은 실을 쥐어주는, 빛나는 めじるし(별).
*
그녀의 연애 소식을 들으며 우리는 졸업을 했다. 앞으로도 동료로서 잘 부탁한다고, 꽃을 가득 안아든 그녀가 꽃보다 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침에 식빵을 물고 기숙사를 나가면 학교로 향하는 길목에 반가운 그녀의 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옆에 서서, 아침은 먹었어? 손에 쥔 또 다른 식빵 한 장을 그녀의 입에 넣어주곤 했다. 익숙하게 받아물고 고마워요, 하고 그녀가 우물우물 말하는 장면이 눈부셨다.
혼자 쓰게 된 기숙사 방 문을 거리낌없이 열고 들어와선 늦었다구요, 아침이에요! 방을 울리는 높은 목소리. 여전히 졸음이 가시지 않은 눈꺼풀을 들면 단정하게 교복을 차려입고서 반쯤은 화내고, 반쯤은 웃고 있는 그런 묘한 표정을 한 그녀가 시야에 들어오곤 했다. 드물게 알람 소리를 듣지 못하고 늦잠을 잘 것 같으면 어떻게 알았는지 깨워주러 오던 그녀였다.
체력만큼은 지지 않을 거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주제에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감기를 달고 다니는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못견디게 귀여웠다. 때마다 홍역을 치르는 그녀 덕분에 나는 제법 죽도 잘 만들게 되었다. 잘 먹지도 못하면서 가루약을 고집하니까 달콤한 초콜렛 한 개를 준비해두는 습관까지 생겼다. 부스스하게 일어나는 그녀의 모습이 부서질 것처럼 사랑스러워서, 그녀가 아프다고 하면 누구보다도 먼저 찾아가 선수를 치곤 했던 것이다.
점심시간, 식당에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나는 곧장 뒷뜰과 숲이 이어지는 길목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어김없이 그녀가 있었다. 이리 온, 언젠가 둘이서 발견한 어린 고양이에게 점심을 챙겨주는 그녀 옆에 말없이 주저앉으면, 고개를 돌려 환한 미소로 답해주는 것이다. 점심 안 먹어요? 특대생은 안 먹어? 저는 얘 밥 주고 먹으려고요. 그래, 그럼 주고 나서 같이 먹자. 그렇게 말끝을 흐리면 그녀는 다시금 말갛게 웃어주곤 했다. 꽤나 많은 시간을 함께 고양이를 돌보며 보냈고, 그녀는 틈날 때마다 핸드폰으로 찍어놓은 사진을 열심히 보여주었다. 이름은 뭘로 지어주면 좋을까요, 함께 머리를 맞대며 고민하다가 이내 나나라고 하면 어때요? 놀리듯 말하는 그녀에게 아니, 히카리라고 하자, 고 똑같은 장난을 되돌려 줄 수는 없었다. 그럼 고양이를 부를 때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도저히 숨길 수가 없을 것 같아서. 너의 이름을 부르고 싶을 때마다 고양이를 돌보러 간다는 핑계를 댈 것 같아서. 히카리, 이리 와. 그렇게 말하는 꿈을 꾸며 셀 수 없이 많은 밤을 지새울 것만 같아서.
이 모든 것들은 추억이 아니었다. 당연한 일상이었다. 몸에 스며들 정도로 당연해서, 이와는 다른 매일이 올 것이라곤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이제 그것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3년의 시간 동안 같은 공간에서 내내 옆에 있어줬던 그녀도, 흐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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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호세키가오카를 졸업한 선배였다. 내가 아는 선배는 원래도 다정한 사람이었고, 그녀의 이야기가 나오면 깊게 미소짓곤 했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그녀였기에 선배에게 마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이전보다 한층 더 빛이 났다. 트위네가 활짝 웃는 사진으로 가득했다. 전문가의 솜씨는 아니지만 애정이 듬뿍 담긴 그 사진을 누가 찍어준 것인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하소연을 하는 법이 없었다. 그랑 유포리아의 일도 그저 조용히 웃어 넘겼으니까 그 그늘이 어느 정도의 깊이인지 나는 모른다. 알고 싶지 않아서 외면해왔다. 떠올리게 되면 그 때 나서서 구해주지 못했던 자신이 싫어질 것 같았다. 선배가 그런 그녀의 전부를 이해하는지는 잘 모른다. 단지, 내가 겁을 먹고 외면한 부분을 직시한 거라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었다. 선배의 앞에서 나는 한없이 초라해졌다.
이듬해, 인기 성우 아마네 히카리의 열애 인정 기사가 떴다. 유례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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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1년을, 또 2년을 보냈는지 도무지 기억할 수가 없다. 술을 많이 마셨을 때처럼 그 시간들만 내게서 증발해버렸다. 함께 웃는 선배와 그녀를 도저히 바라볼 자신이 없어서 머릿속을 통째로 지워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남들의 시간이란 내겐 그저 일, 집, 일, 집, 약간의 잠, 그리고 잠이 오지 않는 밤은 그녀와의 메시지를 읽고, 다시 일, 집의 반복인 나날에 불과했다.
일부러 부지런히 살았다. 누구를 만나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싫어서 사람들과 약속 한 번 잡지 않았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격리 환자처럼 늘 대본 더미에 처박혀 있었다. 워커홀릭이냐는 놀림을 받아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빈 틈이 생기면 그녀와의 거리를 가늠하며 절망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없을 것이었다. 이렇게 지내다보면 저녁을 먹자는 그녀의 연락을 받고 있을 거야, 그렇게 믿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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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일상의 기억을 되찾은 것은 아마도 3년이 흘렀을 때였던가. 시간의 흐름을 가늠할 수 없었으니까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한가지 확실한 건 그 해 겨울 선배가 프로포즈를 결심했다는 사실이다. 둘이 오래 만났잖아, 드디어!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나만 빼고 모두 그랬을 것이다.
그 날 이후로 일상을 잊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았다. 애써 덮으려 할 때마다 선배가 청혼한다는 사실만이 그 위에 수북히 덧칠되어서 또렷하게 떠오를 뿐이었다. 선명한 색이 눈 앞에 떠올라 마구 가슴을 찔러댔다. 생생하게 감각이 살아났다. 시지프스의 족쇄를 달고, 나는 끊임없이 그들의 행복한 나날을 각인해야 하는 형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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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서프라이즈를 준비하는 선배 옆에서, 말없이 도왔다. 언제나처럼 타하핫, 웃을 자신이 없어서 궂은 일만 자청했다. 촛불 천 개 켜기라든지, 그것이 꺼지지 않도록 영하 몇 도의 추위 속에서 몇 시간을 지켜보기라든지, 촛불 길을 만들기 위해 눈삽으로 무릎까지 차오른 눈밭을 퍼내는 거라든지, 그런 일들은 누구와 아무 말을 하지 않고도 묵묵히 할 수 있어서 좋았다.
모두가 선배의 프로포즈를 지켜보려고 모인 가운데 새벽에 지방 무대가 있다는 핑계로 일찌감치 자리를 떴다. 특대생의 놀라는 얼굴을 못 봐서 아쉽네요, 그런 평범한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포장마차에 들러서 혼자 술을 마셨다. 진탕 마시고 택시를 탈 생각이었는데, 성가시게 아직도 막차가 남아있어서 나도 모르게 역으로 향했다. 습관이란 게 참 무서워, 중얼거리며 교통카드를 찍었다. 하필이면 이런 날씨에 외부 역사여서, 잔뜩 취한 채로 플랫폼 의자에 앉아 벌벌 떨면서 __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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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의 존재를 빤히 알면서도 어딘가 부정하고 싶은 내가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항상 내가 있었다고. 언젠가 그녀의 썸이 그랬듯이, 선배와의 긴 연애에도 결국 끝은 있을 거라고. 그렇게 바랐을지도 모른다. 키치죠 군, 더 이상 길을 잃지 말아요, 하고 언젠가는 그녀가 내 손을 잡아 줄 것이라고. 희망을 품었다. 그러니까, 어느 날엔가 톱 성우 아마네 히카리 결별, 같은 기사가 실려 있을 것이었다. 선배가 열심히 찍은 사진 같은 건 다 지워지고 그녀가 오랜만에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말해올 것이었다. 그러면 나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이야__ 같은 못된 속마음은 숨긴 채 그녀에게 해맑게 웃어주겠지.
그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욕심쟁이다.
*
그래도 봄은 온다. 새 신부의 계절, 그녀의 계절이.
단 둘이 저녁을 먹는 일은 두 번 다시 생기지 않았다. 대신, 백화점을 돌던 날이었던가. 키치죠 군, 이 침대 편하죠. 같이 누워보면 어머, 결혼 하시나요? 하고 점원이 다가오고 나는 부정도 긍정도 없이 그저 웃어 보였다. 아뇨, 친구에요. 오늘은 신랑이 바빠서 도와주러 왔어요. 그렇게 대답하는 그녀를 보며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찢기는 것 같았다.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다른 남자에게 가는 것을 응원해야 하는 서브 남주를 맡았을 때는 녹음 도중에 코 끝이 아려와서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잠들 수 없는 밤이 많아졌다. 메시지함을 열면 하나도 지우지 못한 지난 날이 눈앞에 펼쳐졌다. 추억은 그대로인데 그녀는 사라진다. 졸업하던 그 날도 그랬지만, 이번에야말로 영영 사라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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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신랑의 가장 친한 후배, 신부의 가장 친한 친구, 키치죠 나나오가 사회를 보는 것으로 정해졌다.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키치죠 군 말고는 생각할 수도 없어요. 이어지는 야유인지 환호인지로 뒷말이 파묻혔다. 이야, 새 신부가 메리지 블루냐. 뭐야, 이 둘이 결혼하는 거였어? 하지만 그런 농담 속에서도 나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우리 제일 친하잖아요. 그녀는 분명 그렇게 덧붙였다.
나나한테 옷이라도 한 벌 해 줘라, 사람들이 웃었다. 그래, 너희 둘 얘 없었으면 결혼 못 했다. 지난 번에 눈 퍼내는 거 봤어야 하는데. 한 마디씩 거드는 모두가 신나 보였다. 나나 애인 없지? 여자 소개해 달라고 해. 좋다, 그럼 부케도 키치죠가 받는 걸로. 야야, 그거 받고 3개월 안에 못 하면 평생 혼자란다! 끊임없이 놀림이 이어졌지만 이미 그 때쯤에는 귀가 멍해지고 눈이 흐릿해져서 누가 누구였는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타하핫, 그럼 내가 다음 타자야? 겨우, 웃음을 뱉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 나 술 많이 마셨나봐, 좀 걷고 올게, 그런 핑계를 대고 뛰쳐나가 가게 옆 캄캄한 골목길에 숨어 선다. 아무리 숨을 쉬어봐도 가슴이 꽉 막히는 것은 공기 속에 여름의 후덥지근한 습기가 서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너무 덥지는 않아야 할 텐데. 웨딩드레스를 입은 네가 어디까지나 반짝거릴 수 있게, 아름다운 6월이어야 하는데.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우스워 문득 맞은편 도로를 응시한다. 여름 밤 눅눅한 공기 속에서 빨간 불을 내뿜는 자동차도, 행인도, 나트륨빛 가로등도, 모두 점점이 흩어진다. 마치, 이 세상이란 전부 나와 무관한 것처럼.
시야가 흐릿하다고 생각하면 뜨거운 것이 마구 흘러나온다. 엉엉 소리내서 운다. 이렇게나 산산히 바스라지고 있는데도, 앞이 어그러지고 있는데도 나는 나아갈 수 있을까. 길을 잘 잃는 나인데. 별이 없어도 헤매지 않을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의 옆에 선 너에게 여전히 웃어줄 수 있을까. ‘아마네’ 히카리, 지난 7년을 내게는 너 밖에 없었는데.
고개를 젓는다. 이렇게 바라는 게 많다니, 나는 여전히 욕심쟁이다.
오늘밤도 잠이 오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습관처럼, 저장해 둔 그녀의 메시지들을 꺼내 보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