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kari & mate
森重 優那
4화
선배와 함께하는 시간은 거진 내 마음대로였지만, 단 한 번도 그가 귀찮아한다는 인상을 받은 적이 없었다. 덕분에 선배를 상대로는 제법 고집도 피웠다. 축제 날의 사격장에서도, 새해의 베고마 시합에서도, 모두 이겨야 한다고 우기곤 했다. 그러면 선배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기어코 1등 상을 안겨주는 것이다.
그런 날은 언제나 경품을 꼬옥 품에 안은 채 둘이 손을 잡고서 돌아왔다던가, 상품인 오세치 요리를 내 방에서 함께 먹다가 사이좋게 잠들었다던가 하는 추억이 남아 있다. 어쩌면 승부 자체보다도 이런 것들을 바라서 나는, 선배에게만은 제멋대로의 고집쟁이가 되어갔는지도 몰랐다.
‘자, 모리시게 산타 등장! 뭐든 소원을 이루어줄게, 특대생쨩.’
그 말 그대로. 선배는 지나가듯 말한 것조차 기억해 뒀다가 깜짝 선물처럼 눈앞에 내놓았다. 나는 특대생쨩의 의견을 듣고 싶어, 하고 입버릇처럼 말하며 착실히 귀를 기울였다.
그러니까 나는 선배와 있는 시간이 편하고 즐겁다. 내 생각을 숨길 필요도, 남이 하자는 대로 행동할 필요도, 누가 골라준 대로만 따를 필요도 없다. 선배와 함께하는 한 나는 자유롭다. 어디까지나 내 마음대로, 나 자신으로 살 수 있다.
애초에도 사람들의 부탁이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이다. 내가 특별한 존재라서 그런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렇다. 그가 특별하다. 모두가 자기 생각만 늘어놓기 바쁠 때 ‘아마네 히카리’가 어떤 심정일 지 헤아려 주었던 것은 선배 뿐이었다.
‘그랑 유포리아야 어찌 됐든, 네 이름이 이렇게 오르내리는 것 좋지 않고.’
내 평판을 걱정해 주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선배에게만큼은, 언제까지나 어리광을 부렸다.
—
어둑어둑 해가 지기 시작했다.
너무 오랜만에 눈물을 흘려서 힘이 들었다. 달달한 술 한잔 하고 싶다고 흘리듯이 말한 것을 언제 들었는지, 선배가 칵테일 잘 하는 집이 있다며 한 가게에 데려갔다. 버킹엄 궁에서 멀지 않은 아기자기한 재래시장이었다. 자리를 잡았지만, 입맛이 없어서 가장 달고 독한 칵테일 한 잔을 시켜놓고 있었다.
"특대생쨩, 배는 안 고파?"
"아뇨."
"너무 힘이 없어 보이는데."
"아니에요, 괜찮아요.”
“이거 먹을래?”
“선배 거잖아요. 왜 시켜놓고 안 먹고 있어요?”
“너 주려고. 이거 맛있으니까.”
“아니에요. 선배가 먹어요. 선배 건데.”
“그럼 이렇게,”
선배가 샌드위치를 반 잘라 포크로 집었다. 그것을 내 코앞까지 들이미는 것이다.
"정말 괜찮은데.."
“왜 자꾸 눈을 피해?”
“어, 제가 그랬어요?”
정곡을 찔려서 테이블 바닥을 향했던 시선을 슬그머니 선배 쪽으로 옮겨보면, 어느새 샌드위치 대신 그 사람의 얼굴이 훅 다가와 있었다. 깜짝 놀란 마음을 숨기느라 허둥거릴 뻔했다.
"look at me. (여기 좀 봐)"
"왜, 왜요..”
"내 머리카락." 선배의 앞머리가 흔들렸다.
"머리카락?"
”가미가 예전에 이거, 사수자리의 머리카락이래."
"그렇네요." 간신히 말을 뱉어냈다.
"특대생쨩도 사수자리지. 그거 알아? 사수자리의 머리카락으로 주술을 할 수 있대. 가미가 그러더라고, 그러니까 내 머리카락 좀 달라고. 어이없지?”
뭐라고 대답할 틈도 없이 선배가 피식 웃었다.
"사실 네 머리카락이 그 주술에는 더 잘 들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
무슨 주술인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왜 내 머리카락이 더 잘 들었을 거라는 건지, 이유도 궁금하지 않았다. 온 신경이 가까이 다가온 그의 얼굴에 쏠려서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나도 특대생쨩 머리카락이 필요한데.."
"주술 하려고요?"
"아니, 주술이라고 해야 하나.."
선배의 시선이 말없이 내 머리를 타고 내려왔다.
덜컹, 하고 의자가 밀리는 소리가 들리면 이윽고 두 사람의 눈이 더 가까워졌다.
코 바로 앞에 선배의 얼굴이 있어서, 아름다운 머리칼이 뺨을 스쳤다.
숨을 멈췄다.
커다란 손이 천천히 다가와 흘러내린 내 머리카락을 귀에 걸어주었다.
__ 키스, 하는 줄 알았다.
“짠!”
머리카락을 쓸어 내려오던 선배의 손에 하얗고 작은 꽃송이들이 들려 있었다. 선배의 머리카락이 햇빛에 비치면 가끔, 이런 색으로 빛나곤 했는데.
"안개꽃?”
"응, 어때?”
__어떠냐니.
선배의 미소가 눈부셔요.
꽃다발보다 더 하얗게 빛나서, 할 말을 잃었다.
‘안개꽃의 꽃말은 ‘당신의 행복을 바랍니다’.
특대생쨩에게 언제나 행운이 가득하기를 바라.’
분명히 선배는 그렇게 말했다.
함께 마술을 보고 돌아갔던 날, '내가 좋아할 것 같아서 봐 뒀다는' 카페에 들렀지. 나에게 마법을 걸어주겠다며, 테이블 위의 손수건에 마술을 부리자 안개꽃이 튀어나왔다. 그때의 나는 그저 웃을 수 있었다.
지금도 그에게 활짝 웃어 주었으면 좋았을 뻔했다. 하지만 5년 전처럼 솔직하게 ‘고맙습니다’라고는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내게 꽃다발을 들려주곤 그대로 물러나 제자리로 돌아가는 그를 멍하니 쳐다보는 것 말고는.
입이 열리면 그대로 심장의 고동이 밖으로 새어나갈 것 같았다. 언제 전부 준비한 거지. 그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려서 말문이 막혔다.
내가 런던에 오기로 한 때부터 생각해 뒀을까. 아니면, 선배의 집을 떠나서 전화했을 때. 갑작스러운 연락에 무슨 일이 생겼나 걱정한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딜 가면 좋을지까지 애써 계획해 오고. 기운 나게 해 주려고 장난도 걸어주고. 어쩌면 갑자기 울어버렸으니까, 어떻게든 위로해 주려고.
연이어 떠오르는 생각만이 뇌리에 가득했다. 무엇 때문이든 선배가 5년 전의 추억들을 지금까지 기억해 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이 다정함은 모리시게 유우나, 그대로다.
잊고 살았던 것까지 전부 꺼내 들어서.
다시 한 번 두 사람이 마법 같은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거기까지 이르면 가슴이 터져나갈 듯이 뛰어서 심장이 아파왔다.
떨림이 손에 꼭 쥔 꽃다발에 전해진다. 꽃머리가 살짝 흔들려서 마치 하얀 불빛 같았다. 그것을 깜빡이며 바라보다가, 다시 갈 곳 잃은 시선을 헤맸다. 선배를 똑바로 볼 수는 없어서 마침내 창밖을 바라보았다. 해는 이미 땅속으로 사라지고 밝은 조명이 거리마다 둥실거리고 있었다.
겨우 숨을 들이켜고 고개를 돌려보면 맞은편의 선배도 턱을 괸 채 창문 너머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내 모습을 보고 있던 게 아니어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조금 안도해서 찬찬히 선배를 살펴보면, 특유의 차분한 미소가 걸려있다. 그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조금씩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아까 갑자기 울어서 미안했어요.
그리고 전부 고마워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막상 튀어나간 말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영어에도 인연이란 단어가 있을까요?"
"글쎄, destiny(운명)와도 조금 느낌이 다르고."
"그렇죠? 없어요.”
“아아, 없네.”
“있잖아요, 제가 런던을 떠나고 나면 다시 연락하지 말아볼까요?”
말이 입에서 스스럼없이 나갔다. 자신도 참 '쿨'한 말을 해 버렸다는 어이없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 선배의 눈이 커졌다. 왁자지껄한 술집의 소리가 사라지고, 주변 테이블에서 활기차게 밤을 보내던 사람들의 움직임도 멈추었다. 마치 멈춘 영상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러다가 파리에서 우연히 만나면 엄청 신기하잖아요."
커졌던 선배의 눈이 이내 가늘어졌다.
웃고 있다.
"아아, 인연을 테스트해본다는 건가?"
—
자신이 없다.
선배를 잘 아는 척 하지만 정작 선배의 마음에는 확신이 없다. 혼자만 두근거리는 억울한 기분이 땅끝으로 가라앉았다. 나는 인연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다. 선배를 시험하고 자신을 시험하려 한다. 선배가 어디까지나 받아줄지 지켜보고, 안심한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고작 4일로 지난 5년의 공백을 채울 수 있다고 자신할 수가 없다. 선배가 5년 전처럼 아름답고, 귀엽고 짓궂고, 다정할수록 내 마음은 갈 곳을 몰라 하는 것이었다. 멋대로 '모리시게 유우나'는 나와 같은 사람이라고 호언장담 하면서, 막상 눈 앞의 그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 5년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떠난 것인지 아직도 물어보지 못했다.
나는 그를 모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 '갭'을 채우고 싶어서 끊임없이 농담을 치고 받는 핑퐁을 시작했다.
그래도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연락하지 말까요,’ 라고 말하면 선배가 ‘무슨 말이야, 연락 자주 하라고 했잖아’, 그렇게라도 확인해 주기를 바란다. 5년의 깊은 낭떠러지 위로 '인연'이라는 단어라도 빌려와서 흔들다리나마 하나 놓고, 선배가 이쪽으로 건너와주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선배는 어두운 바다 너머로 나를 바라 볼 뿐이다. 결코 내가 원하는 답을 해주지 않는다. 두 사람 사이의 파도는 너무 높고 어둡다. 나는 계속해서 그 사실만을 확인하고 있다. 애써 어처구니 없는 말들을 얼버무려도, 결코 메울 수 없는 공간이 있다는 것을, 직접 듣지 않아도 깨닫고 만다.
바보같이.
먼저 끝을 말한 것은 나인데, 막상 그것을 반기는 선배의 반응을 보면 가슴이 조여온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이 이렇게나 변덕스럽고 부조리하다.
오늘 하루만도 웃고, 당황하고, 울고, 놀라고, 멍하고, 그리고 지금은, 슬프다.
이건 마치 자기 좋은 대로나 행동하는 되바라진 어린애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어쩔 수가 없다. 무엇도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선배의 한 마디 행동 하나에 시시각각 반응한다. 언어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을 뒤집어 쓰고, 그 감당할 수 없는 압력에 온몸이 휘우청댄다. 밤의 런던이 점점 더 깊이 다가온다.
나 혼자만 극락과 지옥을 오가고 있다. 참으로 불합리한 일이다.
저렇게나 태평한 선배를 앞에 두고, 억울함이 어둠처럼 스며들었다.
꽃다발을 쥔 두 손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저.. 이제 일어날까요? 리버풀 역으로 가야 해요. 친구랑 거기서 만나기로 했어요."
"몇 시에 보기로 했는데?"
"열 시쯤?"
"그럼 아직도 시간이 남았네. 그동안 어디에서 기다리려고."
"잘 모르겠어요."
"같이 기다려줄게. 리버풀 역 근처에 작은 공원이 있으니까, 거기 가자. 지금 튤립이 피어있어."
거절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것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처음부터 나는 데려다주겠다는 말을 기대했을 지 모른다.
—
"오늘 쓴 안경은 못 보던 건데."
"맞아, 아끼는 거야.”
"좀 봐도 돼요?"
튤립 향기로 가득한 공원은 밤이 깊어선지 한적했다.
선배와 나, 튤립, 그리고 레몬 빛 조명 뿐이었다.
"조심해. 그거 없으면 곤란하니까. that’s bloody expensive.”
선배의 입에서 곤란하다는 단어가 나오다니. 듣는 순간 미소가 걸리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하루 내내 쭉 놀림받고 당황하는 건 내 몫이었으니까, 반대 상황이 되어서 조금 신났다. 어딘가엔 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선배에게 작은 벌을 내려야겠다는 엉뚱한 복수심도 작용했을 것이다. 예전의 나라면 곤란하군요! 하며 선배에게 바로 안경을 씌워줬을 테지만, 하지만, 어떨까.
작은 악마가 고개를 들었다. 오늘 선배가 먼저 잘못한 거예요.
되돌려 줄 생각만으로 꽤나 득의양양해졌다.
"그렇구나.. 선배는 안경이 없으면 안 되니까. 조금 밟아볼까요?"
그렇다고는 해도 언제나 내 장난은 선배의 농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었다.
"잠깐, 안 돼, 절대 안 돼."
"어쩐지 신선하네요. 그냥 돌려주기엔 아까운데."
"어른을 놀리면 못 써. 자, 어서 돌려줘."
"그럼 일단 밟아서.."
"미안합니다, 안경을 돌려주시겠습니까?"
"선배가 이러는 걸 보니까 더 주기가 싫어졌어요."
이 표정이다.
이노리가 폭주하고, 신이 자신의 세계에 빠져들 때, 탈주한 코쿠요 군을 겨우 찾아냈을 때, 아라타가 마이너스 이온을 내뿜을 때. 메이시가 통제를 잃었을 때 선배가 짓곤 하던 그 절망 조금, 당황 약간, 한숨 섞인 표정. 이런 귀여운 그가 나에게는 직구였다. 선배에게 장난치는 것은 얼마간 즐거웠던 기억을 떠올리게 해서 정말 편안해진다.
이런 고약함이 내게도 있다는 것을 선배를 통해 처음 깨달았다.
"하아.. 그래, mean girl. 딜을 하자고?"
"mean한 건 선배잖아요. 어쨌든 좋아요, 적절한 조건을 제시해보세요."
"뭐가 좋을까. 전혀 모르겠는데."
"조금은 고민하는 척이라도 해요.”
"정말 모르겠어. 원하는 건 다 들어줄게.”
또다.
특대생쨩이 원하는 건 뭐야. 전부 들어줄게.
정말 약간의 장난이면 되었다. 선배가 항상 그러는 것처럼 상대를 잔뜩 골려주고는 미안 미안, 농담인데, 하고 웃으며 끝나는 장난. 하지만 선배는 이런 순간조차 위세를 부린다. 그 여유로움이 얄밉다. 나는 선배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안경을 돌려주었다.
동시에 그의 뺨에 닿을 듯 말듯 입을 맞추었다.
—
농담이었어요.
그렇게 말하기엔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았다.
선배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저 발 끝에 시선을 두고 애먼 안경을 만지작거렸다.
"고마워."
순간의 시간이 영겁처럼 느껴질 즈음에야, 선배가 입을 열었다.
"네?"
"안경에다가, 키스. kiss and the glasses."
"안경에다 하지 않았어요. I didn’t kiss on the glasses."
"하하, 알아. 그랬다면 고맙진 않았을 거야."
"아, 하하, 그렇네요. 안경, 에다 키스라고 한 거구나! 제가 잘못 알아들었네요!"
어색하게 웃던 순간 눈이 마주쳤다.
선배의 손가락이 내 머리카락을 상냥하게 쓸어올렸다.
몇번이나 몇번이나, 그의 손은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선배의 머리카락이, 뭐라고 했더라.
무슨 주술이라고 했지?
애써 생각을 되짚어가고 보면, 선배도 나도 더 이상 웃지 않았다.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그러니까, 무슨 주술이라고 했더라.
나는 눈을 감았다.
크리스마스 맛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