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森重 優那

 

Invisible_Beau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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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안녕, 선배. 좋은 아침."

"아직 해 안 떴어." 선배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했다.

"아직도요?” 어처구니없는 쪽은 나였다. 열흘은 흐른 것 같은데 아직도 마지막 밤이다.

 

“신선계인가? 하루가 지상의 몇십 년 이런 거. 그럼 진짜 당장 여기서 벗어나야 하는데!”  

나는 키득거렸다. 농담 같은 것은 전부 이 사람에게 배운 거니까, 이런 못 알아들을 말도 선배라면 받아내 줄 것을 알고 있다. 새삼 둘이 밤을 새우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간질거려서 장난이라도 치고 싶었다. 꿈꾸는 기분이 드니까 이렇게 킬킬거릴 여유도 있고, 정직히 말하면 좋았다. 술에 취해 있음에 이렇게 감사했던 적이 없었다. 

 

"그거 위험하네. 인간계로 같이 도망이라도 할까?” 언제나처럼 받아치며 선배가 웃었다.

"네(no), 저 혼자 가야죠! 언제 나갔는지도 모르게."

"여기 나 혼자 두고 간다고? 그럼 다시 데려 와야겠네."

"소용없어요. 추노질도 아니고."

 

와인에 잔뜩 절은 듯 새파랗게 질린 새벽빛이 조금씩 보라색으로 변해가는 것에 집중하며 나는 대답했다. 

 

"아냐, 여기 있어. 나 진지해."

 

선배의 이런 성실한 반응은 술을 많이 마셨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리라. 그래서 전혀 대꾸도 않았다. 선배는 정말로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인간계고 신선계고 뭐고, 전부 다 질린 거지? 어떻게 해야 할지, 뭐가 뭔지 모르겠고. 그래서 일단 떠나고 보는 거잖아. 나중에 돌아가면 어떻게든 해결되어 있겠지 싶고. 안녕, 하고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고.”

 

여전히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선배의 목소리가 귓바퀴에 걸려 이명 같았다.

 

"히카리(빛)는 강해. 도망가는 것도 괜찮아. 그치만 나중에 돌아가고 싶을 때는 늦어. 그럴 땐, 옆에 있어줄 사람이 필요해. 잡아 줄 사람."

 

선배가 담담하게 말했다. 나를 빛이라고 불렀다. 웅웅거림이 멈추지 않았다.

 

"가지 마. 내가 잡아줄게."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깊은 울림에 인력처럼 끌려서, 나는 기어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선배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를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어서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밖은 완전히 여명으로 뒤덮여서 이제는 오묘한 주홍빛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무지개색으로 덮여갔다. 저것은 선배의 미소를 닮았고, 메이시의 색이다. 

 

「朝が来たら (아침이 오면)

日差し浴びて (햇살이 드는) 

きみの部屋へ (너의 방으로)」

 

선배가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것은 그리움이었다.

 

「目が合えば (눈이 마주치면) 

聞こえるね (들릴 거야)」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밤이 지나고 세상이 무지개색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그리움이 가득 찬 고요한 거실에, 노래 가사처럼 「가슴 뛰는 소리」 가 퍼진다. 두 사람이 눈을 맞춘다. 그가 없던 지난 밤들의 쓸쓸함을 점차 물들여 간다. 그리고 눈 앞에는, 선배가 있다.

 

"きみが好きだ (네가 좋아).”

"그거 이노리 파트였던가..”

"아니, 아라타 파트. 가미가 지금 이걸 알면 날 물지도 모르겠다.”

 

그 이후로는 기억이 없다.

 

 

 

 

 

 

머리가 은은하게 아파온다고 생각하면, 어느새 동이 터 있었다. 빛이 들어찬 집안이 온통 고요했다. 거실에 선배가 없는 걸 보면 자러 방에 들어간 걸지도 모른다. 그런 장면은 기억에 없어서 어제의 일이 전부 꿈 같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 거야, 수분을 보충해야 해, 거의 의무적으로 떠올렸다. 

 

"선배?"

 

부엌 한 구석에 비뚤어진 안경을 쓰고 있는 선배가 서 있었다.

마치 내가 그려 준 그림처럼.

 

"아.. 특대생쨩, 일어났네."

 

물 마실거지? 하고 선배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한숨을 내쉬고 탁 닫는다. 이번에는 찬장을 연다. 이내 또 탁 닫는 소리가 났다고 생각하면 어느새 싱크대 아래의 선반을 뒤지고 있다. 고작 사흘 묵으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집구석엔 먹을 것이 없다. 심지어 생수조차. 

 

"선배, 됐으니까 앉아 있어요.."

"응.. 특대생쨩 침대 좀 빌릴게.”

 

그가 이마를 쥐고 소파에 드러누웠다. 확실히 많이 마셨지. 둘이서 와인 세 병이라니. 나는 가방에서 어제 사 둔 생수를 꺼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선배가 벌떡 일어나서 다가왔다. 

 

“왜요? 누워있지.”

“따 줄게.”

“괜찮은데.”

 

대답을 채 마치기도 전에 내 손에 들린 생수를 집어들고 뚜껑을 딴다. 먼저 마시라고 건네주는 일련의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매너가 좋다고 생각할 뻔했다. 

 

“이런 건 누가 가르쳐 줬어요?” 전 여자친구겠지, 라고 생각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헤에, 물 따는 법도 모를 정도의 바보로 안 거야?”

 

__그게 아니구요.

단호하게 한 마디 하려고 들면 문득 다시 그리움이 덮쳐왔다. 예전에도 이렇게 선배에게 핀잔을 주는 일이 종종 있었다. 친절하고 상냥하기만 한 아마네 히카리가 어쩐지 모리시게 유우나에게만은 심술궂을 수 있었다. 갑자기 차오르는 감정에 말문이 막혔다.

 

“특대생쨩?” 까닭을 알 리 없는 선배가 갸웃하며 내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아, 아뇨! 음, 바보는 아니고, 술주정뱅이?”

 

갑자기 시야에 들어오는 선배의 얼굴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당황한 나머지 또 아무 말을 해 버렸다. 

 

“술주정뱅이라니, 너무하네.”

“선배 술 마시고 노래도 부르고. 그거 술주정 아니었어요?”

 

대충 둘러대는 것 치고는 굉장한 센스라고 생각했다. 선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눈이 커지더니 안경이 조금 흘러내렸다. 

 

“노래를 불렀다고? 내가?”

“네. 아침이 오면, 햇살이 드는 너의 방으로..”

“우와, 농담이지?”

 

그거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에요. 선배 그리고 안경, 비뚤어졌는데. 장난기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이 바보같은 모습을 더 감상하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나는 콧잔등을 살짝 찡그리며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선배 기억 안 나는 거예요? 진짜 많이 취했나 보다.”

“아냐 나 멀쩡해,” 물론 머리는 조금, 아니 꽤 아프지만, 선배가 덧붙였다. 

“필름 끊긴 거 아니에요?” 

사실 그건 내 쪽이었지만 영원히 말해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닌데, 나 그런 적 한 번도 없는데..”

 

선배의 안경이 조금 더 흘러내렸다. 그 장면이 너무 웃겨서 이대로 있고 싶었다. 

 

“...농담 맞지?”

“뭐, 선배, 괜찮아요. 살다 보면 술 마시다가 필름 끊기는 날도 오는 거고__”

 

아직 간은 젊으니까요, 하고 놀리듯이 키득거렸다. 멍하니 나를 쳐다보던 선배의 입꼬리에 슬몃 웃음이 서렸다. 장난 맞네, 근거도 없이 확신하는 선배에게 나는, 어, 진짜에요, 하고 다시 받아쳤다. 나조차도 어딘가부터는 기억이 없는 주제에, 일단은 선배를 놀리고 싶은 생각 뿐이다. 정말이지 재미도 감동도 없는 비건설적인 장난이란 전부 그에게 배워서, 이런 것이 통하는 것도 선배뿐일 것이다. 

 

“노래는 술 먹고 하는 게 아냐, 경건하게 하는 거지.”

“맞아요, 경건하게. 노래방에서 밤 새면서.” 한 손을 가슴에 얹고 키들거렸다. 

“그렇지. 대학생이라면 노래방에서 아침까지 사는 거지.” 

 

선배가 바로 맞받아치며 킥킥거렸다. 함께 노래방에 갔던 일을 기억하는 것이다.

 

물론 내가 일방적으로 끌고 갔던 것이니까 함께 갔다기엔 어폐가 있을 지 모른다. 여하튼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대학생이라면 자고로 노래방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거죠. 당연한 듯이 말하는 내게 그건 아닌 것 같은데, 하고 대답하면서도 착실히 끌려와 주었다. 배역 같은 건 새까맣게 잊고 그저 선배와 놀고 싶었던 나에게 정말 성실하게도 휘둘려 주었다.

 

즐거웠던 추억이 눈앞의 장면과 겹쳐져서, 가슴에 무언가가 몽글몽글 솟아나는 기분이다. 이 기분을 지금은 더 만끽하고 싶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추억의 노래방 개장. 선배부터 한 소절 부탁드립니다!”

“잠깐, 대학생은 특대생쨩이잖아.” 

그렇게 말하면서도 선배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침이 오면.. 目が合えば, 눈이 맞았네, 맞았어.” 

 

막상 부르는 노래란 음이 없는 가사의 나열이라서 어설픈 예능쇼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경건함이라곤 조금도 없어서, 나는 큰 소리로 웃고 말았다. 

 

“心はずむ音, 막 심장 소리 들리고요.” 깔깔 웃으면서도 질세라 받아쳤다. 

“走りだそう, 달려서 그렇지?”

 

음은 전혀 없이 가사로 장난치는 두 사람이 마구 신났다. 함께 큰 소리로 웃었다.

나야말로 정말 필름이 끊겼던 건지, 그건 꿈이었는지, 새벽의 경계 어딘가에 있었는지, 그런 공상과학만화 같은 설정은 잘 모르겠다. 그저 그와 내가 함께 있었고, 이렇게 같이 노래하는 것으로 됐다.

 

"선배, 

きみが好きだ 「당신이 좋아」."

 

"응, 

つれていってあげる 「데려가 줄게」."

 

또 동시에 웃었다. 

 

“아, 너무 웃었더니 더 목마르다.”

“어, 선배 미안해요. 물 다 마셔버렸다..”

 

 

 

 

 

 

그리고 다음 장면에서, 갑작스럽게 나는 선배의 배웅을 받는 것이다.

 

"런던에 있는 동안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도심으로 향하는 381 버스에 몸을 실었다. 창문 너머로 선배의 모습을 좇았다. 버스가 떠나가도 한참을. 마지막으로 본 선배는 오래도록 이쪽을 응시했다. 손도 흔들지 않고, 아마 버스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역시 선배나 나 둘 중 하나는 필름이 끊겼던 것이 틀림없다. 아니면 꿈이었거나. 현실의 그는 가지 말라는 말 따위는 하지 않는다. 선배를 끝까지 보기 위해 돌렸던 몸을 앞으로 고쳐앉으며 생각했다. 

 

 

 

 

 

 

친구는 앞선 3일을 어디에서 보낸 거냐며 성화였다. 틀림없이 걱정한 것이다. 

 

미안 미안, 아는 사람이 자기 집에도 꼭 오라고 해서!

 

그런 거짓말을 하느라 진땀을 뺐다. 선배가 먼저 오라고 한 적은 없다. 내가 먼저 부탁했다. 그러면서까지 선배의 집에 머물러야 했는가 반문해보면, 꼭 그럴 필요는 없었다. 예산이 빠듯하다고 말했으면 친구는 기꺼이 3일을 더 재워줬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선배에게 말을 꺼낸 건지, 아직도 그 순간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다. 자신도 모르는 걸 타인이 이해해 줄 수 있을 리는 더더욱 없다. 완벽하게 혼자다. 그 사실이 외롭고 견디기 힘들어서, 언제나 적당한 핑계를 대고 거리를 둘 뿐이다.

 

지난 3일이 더욱 더 꿈 같다.

 

 

 

 

 

 

그날 저녁도 홀로 밥을 먹었다. 술이 잔뜩 올랐을 때 또 선배가 떠올랐다. 어디 있는지, 뭐 하는지, 누구랑 있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5년 동안은 뭐하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떠나는 것을 붙잡지도 않았으면서.

 

여전히 나는 혼자다. 낯선 곳에서 무거운 밤을 헤맨다. 멀리 새빨간 공중전화 박스가 보였다. 요즘 세상에도 공중전화를 쓰는 사람이 있을까. 영국스럽다는 이유 외에는 쓸모가 없는 옛날 물건이다. 저 전화박스는 나다. 과거는 이미 빛이 바랜 지 오래인데도 안간힘을 쓰며 점멸한다. 어느 곳에선가 유물로 남아 한때는 '히카리'였다고 외롭게 외칠 뿐이다. 

 

전화박스 안으로 들어갔다. 이렇게나 자신의 존재를 외치는데도 사람들은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무심히 갈 길을 간다. 어쩐지 서글퍼졌다. 나라도 이 가여운 물건을 잊지 말아야지, 생각하며 주머니 속에서 동전을 몇 개 꺼냈다. 낡은 수화기를 들고 동전을 밀어 넣으면 전화할 곳은 한 군데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모리시게 유우나

+41-xxx-xxx-xxxx

 

내가 빛이라면 그는 상냥함이다. 

핸드폰 화면에 선배의 번호를 띄우면, 상냥함으로 반짝반짝해졌다. 

선배는 ‘히카리’가 너무 눈부셔서 한참을 보기만 했던 걸까. 

누르면 그 빛이 사라지는 걸까.

그래도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연락하라고 말해주었잖아? 

아무 일도 없지만 괜찮겠지.

아니, 아무 일이 있어. 혼자가 외롭고, 슬프고.

__ 그리고 그가 보고 싶다.

 

‘유우나’가 눈이 부셔서 한참 바라보다가 공중전화 숫자판을 꾹꾹 눌렀다. 

 

「특대생쨩?」 

 

신호음이 가기도 전에 받아서 도리어 이쪽이 놀랐다. 

 

「여보세요,도 아니고 대뜸 특대생쨩이에요?」 

「어, 맞잖아!」 수화기 너머로 선배가 낄낄거렸다. 

「바로 받았네요.」

「마침 핸드폰 보고있었어.」

「저인 줄 어떻게 알았어요.」

「설마 했는데 진짜였어. 뭐야 근데, 이 번호는.」

「공중전화요.」

「핸드폰으로 하면 될 걸 굳이.」

 

그냥요, 하고 대답하고 나면 정작 할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너무 반짝거려서 포기했다는 선배의 기분을 나는 안다. 왜 갑자기 전화를 걸었는지 이렇게도 설명할 길이 없는 것이다. 

 

「그.. 선배, 뭐 하고 있어요?」

「밥 먹어.」

「거짓말, 그 집에 먹을 게 뭐가 있다고.」

「진짜야. 옥수수랑 콩이랑 삶아서.」

「아, 알겠다. 대충 냉동식품 다 때려 넣어서?」

「..너는 말야, 나를 너무 잘 알아.」 

「큰일이다. 이러면 자랑하고 싶어지잖아요. 오늘 내가 먹은 거.」

「뭐 먹었는데?」

「고든 램지(영국 유명 셰프) 스테이크요.」

「와, 너, 우리 집에서 자면서 아낀 돈으로 그런 데 가는 거구나!」

「이런 게 여행의 묘미죠. 이런데도 못 갈 거면 여행을 왜 해요!」

「그 말을 들으니까 갑자기 내 콩이랑 옥수수에서 종이 맛이 난다.」

「음, 네, 그치만,」

 

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예전에 선배가 구워 준 고기보다는 맛없어요.」

 

위로가 될 진 모르겠지만요, 라고 속삭이듯 덧붙였다. 

 

「기쁘긴 한데.. 비교는 좀 무리다.」 

「그치만 정말 맛있었단 말이에요, 선배가 구워준 고기.」

「거기엔 특대생쨩을 위한 특별 레시피가 들어갔으니까, 막 이래. 부끄러우니까 인제 그만!」

「아니, 그건가 봐요. 왜 그 때보다 맛이 없나 했더니,」 

 

갑자기 숨이 가빠왔다. 잠시 멈춰서 호흡을 가다듬고 들릴까 말까 한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지금은 선배가 없어서 그래요. 혼자라서.」

 

이번에는 선배가 말이 없었다. 들었을지 모르겠다. 

부끄러워서 서둘러 화제를 바꿨다.

 

「저 심심해요. 선배, 내일 일 끝나고 만나요.」

「그래, 거기가 어딘데? 내가 갈게.」

「아뇨, 아뇨. 그럴 필요 없어요. 모뉴먼트 역에서 만나요.」 

「너 거기 굉장히 좋아하는구나.」

「그냥 편하잖아요. 아 이제 동전 없다.」

「알았어. 일 끝나는 시간 문자로 알려줄게.」

 

처음부터 문자로 얘기했으면 됐잖아, 귀엽게 구시렁대는 선배의 낮은 한숨 너머로 끊어요, 하고 재빠르게 수화기를 걸었다. 모뉴먼트 역. 그곳이 런던에서 선배를 제일 처음 만난 곳이기 때문이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달칵 전화 연결이 끊기는 소리를 확인하자마자 큰일이라도 치른 것처럼 숨을 한꺼번에 몰아쉬었다. 왠지 지쳐서 전화박스 벽에 기대어 핸드폰을 꺼내들면 새로운 메시지가 와 있었다. 발신자, 모리시게 유우나. 벌써 문자를 보냈을 리가 없는데. 물끄러미 화면을 바라보면 수신시각은, 선배에게 막 전화를 걸었던 그 시각. 

 

어쩌면, 우리는 통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 당토 않은 예감에 심장이 튀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메시지 함을 열었다.

 

「안녕, mean girl

오늘 하루는 어땠어. 친구 집에는 잘 도착했고?

어디서 뭐 하는지 연락하라니까.

strange that you're not around anymore..

보면 연락줘

 

베티」

 

 

 

 

 

 

세 번째로 모뉴먼트 역에서 만났을 때, 선배는 까만 수트에 까만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회잿빛으로 빛나는 반곱슬 머리카락 아래로 까만 테가 반짝였다. 그 아래로 곧고 늠름하게 솟은 콧대와, 에머랄드 그린과 블루 사이 어딘가의 청명한 눈동자. 큼직하게 시원스러운 눈은 언제나처럼 다정하고 깊은 빛을 담고 있다. 핏 좋은 수트는 습관적인 운동으로 다져져 딱 벌어진 가슴과 호리호리하게 뻗은 긴 다리에 보기좋게 휘감겨서, 선배의 단단한 몸을 더 돋보이게 했다. 

 

5년 전부터도 큰 키와 곧은 몸, 멋진 외모로 많은 여성팬을 거느리던 사람이다. 이런 관찰은 새삼스럽기 그지없는 것이지만, 역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보기 드물게 반듯하고 근사한 이목구비,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외모. 세상은 이런 사람을 일컬어 미남자라고 하지. 그러니까 선배의 어깨가 저렇게 넓었던가. 그러고 보면 키가 더 큰 것도 같고. 찰나의 순간 흘러가는 의식을 붙잡고 뱉어낸 말은 아주 심플했다.  

 

"수트다. 안경도 다르고."

"어때, 괜찮지?"

"네, 귀여워요.”

"귀엽다니.. 차라리 어색하다고 해 줘."

"정말 귀여운데."

"특대생쨩은 그 모자 뭐야. 휴양지에 왔어?"

"이거, 저는 햇빛 알레르기가 있어서."

“아아, that’s lovely.”

"차라리 어색하다고 해 주세요."

 

선배의 수트 차림은 상상한 적도, 보게 될 거라고 기대한 적도 없었다. 무심코 심장이 두근거려서 또 아무 말이나 튀어나가 버렸다. 왠지 솔직하게 멋지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하필 고른 단어가 ‘귀엽다’라니.

 

이런 단어는 아마도, 선배가 실수했던 때에나 썼던 것이었다. 테마파크 이벤트를 앞두고 공룡 이름 맞추기 게임을 하던 때였던가. 선배가 매직사우르스! 라고 당당하게 외쳤던 기억이 있다. 매직(마술) 너무 좋아하네 나, 부끄러워하던 선배에게 반쯤은 농담, 반쯤은 진심으로 ‘귀여워요’ 하고 말하면, 선배는 ‘그런 말은 너에게나 어울려’ 라며 곱절로 되돌려주었다. 

 

그 때는 내가 귀엽다,고. 그리고 지금은 사랑스럽다,고.

 

거듭 상기하지만 결코 단어 그대로의 의미가 아닌 것을 알고 있다. 이런 종류의 언어는,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알고 있는데도, 그날의 귀여운 선배와 지나치게 멋진 지금의 선배가 겹쳐져서 마구 마음을 헤집었다. 이렇게나, 귀엽고 근사한 사람이 내 앞에 서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온 몸의 오소소 떨리는 기분이었다.

이대로 긴장하면 분위기가 이상해질 것이다. 

 

“오늘은 어디에 갈까요? 선배가 결정하는 날이니까.” 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돌렸다. 

“특대생쨩을 위한 장소.” 

 

물을 필요도 없었다. 어쩐 일인지 선배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데려가고 싶은 곳이 있다,며 안내를 자처하는 것이다.

 

"선배, 평소랑은 좀 다르네요." 

"응, 멋있지?" 

 

__ 아니, 그거 말고요. 

드물게 망설임 없이 결정하는 모습을 칭찬해주고 싶었던 건데, 혼자 어긋나서 우쭐해 한다. 

 

"네, 귀여워요."

"귀엽다는 말은 특대생쨩 같은 사람한테 쓰는 말이지. 그래, 그 모자 같은 거.”

 

__ 정말이지. 이 사람은 한 마디도 지지 않는다.

과거의 대사를 그대로 가져오는 것은 반칙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모자를 벗어서 두 손에 들고 살짝 흔들어 보였다. 

 

"선배, 여긴 영국이잖아요? 모자의 나라!”

"응, 확실히 지금 가려는 곳이랑 어울리네."

 

완패다.

이렇게 멋진 모습을 하고서 또 장난이나 치는 사람이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놀림받는 것은, 결국 내 쪽.

토라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어색해지든 말든 아무려면 어때.

 

사실 평소와는 ‘다른’ 것은 내 쪽이었다. 다르고 싶었다는 것이 옳겠다. 

 

햇빛 알레르기 따위는 그냥 둘러댄 말이다. 사실은 선배에게 잘 보이고 싶었어요, 그런 말이 나올 리 없었다. 잘 보이고 싶은 물건이라기엔 계절에도 장소에도 맞지 않았다. 챙이 넓은 이 휴양지용 모자는 한여름 그리스의 해변에서 쓰려고 가져온 것이다. 6개월의 긴 여행에 챙겨온 것은 고작 이런 것들뿐이다. 선배에게 보여줄 것이라곤 조금도 없다. 

지나치게 근사한 모습의 런던 가이와, 그 옆에 비루한 여행객 하나.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이 나란히 걷는 영상이 왠지 성가시다.  

그의 앞에서 나는 한없이 바보가 된다. 

부끄러움으로 가슴 속이 울컥이다가 이내 텅 비었다.

“특대생쨩?” 

 

모자의 넓은 챙 양 끝을 그러잡고 멍하니 걷다가 선배의 목소리를 듣고 정신이 들었다. 

 

“무슨 일이야, 몇 번을 불러도 모르고.”

"아, 미안해요. 다 왔어요?”

“응, 봐봐,” 갑자기 팔이 어깨를 감쌌다. 

“네?”

“버킹엄 궁이야.”

 

끌어당기는 선배의 팔을 따라 이끌려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시끄러울 정도로 울리는 심장 소리가 그의 팔에 전해질 것 같아서 화들짝 놀랐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한 걸음 내딛는 척하며 선배의 팔에서 벗어났다.

 

"아, 궁전이구나. 어딘가 괴리감이 있는데..”

"그치, 뭔지 알아. 동화 속에 나오는 궁전 안 같지."

"맞아요, 맞아요. 뭔가 너무 웅장해서요."

 

당황해서 깨닫고 보면 또 아무렇게나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아직 어깨에 그의 온기가 남아있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

망가진 병정 인형처럼 손과 발이 동시에 나가는 나를 지긋이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래도 특대생쨩이랑 어울리는 장소잖아. 공주님에게." 선배가 모자를 가리켰다.

"정말, 그만 놀려요 선배!"

"놀리는 것 아닌데. 공주, 오늘 밤은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나만의 것으로..."

"선배, 네(no), 네(no)!!"

 

공주라니, 오늘 밤이라니, 이번엔 또 무슨 얼토당토 않은 말을 하는 거야.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눈에 띄지 않도록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팔과 다리를 사용해서, 같은 쪽이 동시에 나가지 않도록 신경 쓰며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움직였는데 선배는 잘도 따라붙었다. 거리를 두려는 심산으로 속도를 냈지만 이렇게 바짝 쫓아오면 아무 의미가 없다. 

이렇게 별것도 아닌 일에서조차 나는 선배를 이길 수가 없구나. 

제풀에 지쳐서 곧 발걸음을 늘어뜨렸다. 선배도 같이 느려졌다. 

 

"하하하, 새삼스럽다. 예전에도 이거 했잖아. 역할극으로."

"그런 거 언제요."

"기억 안 나? 내 생일날. 특대생쨩이 공주 하고 내가 왕자.."

"그만요! 몰라요."

 

부끄러워 터질 듯한 얼굴을 들여다보곤 선배가 즐겁다는 듯 웃었다. 

빙글거리는 얼굴을 보고서야 퍼뜩 깨닫는다. 

선배, 일부러 놀리고 있는 거구나.

그의 머리 위로 햇살이 길게 늘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여유만만, 이것만큼 선배를 잘 설명하는 단어가 있을까. 볕이 기나긴 하품을 하면서 그늘을 만들어 냈다. 선배의 얼굴 위로 구름 모양의 그림자가 졌다. 반쯤은 빛나고, 반쯤은 어두운 웃음. 그 모습이 어딘가 현실에서 빗나가 보였기 때문에, 둔한 나는 겨우 알아챘다. 선배는 내 스위치를 켜 주고 싶었던 것이다. 멍하게 휘청거리는 모습이 어딘가 닳아버린 배터리 같아보였던 걸까.

 

상냥함인지 짓궂음인지 모르겠다.

걸음을 멈추고 눈에 띄는 아무 벤치에나 털썩 주저앉았다. 선배가 옆에 따라 앉았다. 

 

"그치만 정말 런던에서 공주에게 가장 어울리는 장소는 어디일까, 진지하게 생각한 건데."

"공주 아니라니까요."

"신데렐라도 공주잖아."

신데렐라?”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괴리감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선배의 놀림에 발끈해서 조금 휩쓸리기야 했어도, 이 정도 장난쯤이야, 사실 선배와 나에게는 익숙한 주고 받기니까. 손발이 척척 맞아서 탁구공이 양 쪽을 쉴 새 없이 오가고, 그러다 보면 한 쪽이 쾌속 서브를 찔러넣는 경우도 있다. 요컨대, 한번씩 서로를 곯려주는 타임은 우리의 핑퐁에선 비장의 무기랄 것도 없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신데렐라, 라는 단어를 발음해서 말로 뱉는 순간 마음 속 어딘가 탁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발목을 칭칭 감고 있던 쇠사슬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지고, 그대로 개가 양떼를 몰듯이 정신없이 휘몰려서, 문득 발 끝에 돌부리가 걸리는 느낌에 뒤를 돌아보면 어느 순간 벼랑 끝에 서 있었다. 놀랐다. 돌부리에 채이지 않았으면 이대로 벼랑 아래로 떨어질 뻔 했다. 

 

그 갭을 받아들이느라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가, 다시 감았다가, 또 떴다. 5년 만에 듣는 단어에 신체기관 어딘가가 어긋났을지도 몰랐다. 20년만의 여학생, 학교를 구해 낸 특대생, 그랑 유포리아의 영웅, 일약 신데렐라. 잡지 기사의 굵은 글씨가 차례로 떠오르며, 그제서야 잠시 인지 부조화가 왔다는 것을 알아챘다. 앉아있는 벤치의 딱딱함이 얼얼하게 느껴졌다. 발 밑에 구름이 지나가는 것처럼 몸이 둥실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머릿 속에서 5년의 시간이 타임머신을 탄 것처럼 어지럽게 돌았다. 

 

“응. 마법은 못 부려서 호박 마차도 없고 유리구두도 없지만, 그래도 좀 기분이 나지?”

 

기분이 나냐,니.

 

다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옆에 앉아 씨익 웃는 선배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 너머로 버킹엄 궁전이 필름 카메라 속의 배경처럼 뿌옇게 멀어졌다. 알고 있다. 누구에게나 그런 사람이다. 

하나도 안 멋있어. 그런 것. 

기껏 용기를 끌어모아서 만나자고 했는데.

만나서부터 내내 사람을 놀리거나 곤란하게 만들기만 하고. 

이제 와서 날 생각했다고 말하면 __

 

 

"이제 신데렐라 아닌데.."

"응?”

"저, 아닌데.." 

 

 

맹세컨대 나는 나름대로 담담하게 살아오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학교를 그만둔 순간부터 그랑 유포리아 이야기는 꺼내지 않기로 정했지만, 그래도 꽤나 아무렇지 않게 지내려고 상당히 애썼다. 못 버텨서 도망가는 게 아니야, 그렇게 힘주어 생각했으니까 일부러 상기하는 일이 없었을 뿐이다. 

 

 

그런데,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다시금 말하지만 나는 정말 아무렇지 않게 지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선배와 서로 말도 안 되는 도발을 걸고 있었다는 게 그 증거다. 

그런데, 선배, 저 왠지,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맴돌면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__

신데렐라가 밟고 있는 계단 끝이 아래서부터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놀란 것은 나 자신이었다. 

눈물샘이 고장 났나 싶을 정도로 운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나와 상관 없는 기관에서 퐁퐁 샘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무너진 둑처럼 막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선배는 영문도 모른 채 당황할 것이다. 뭐라도 좋으니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평소에 잘 하는 아무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이 조급할수록 입이 열리지 않았다. 

 

 

창피해서 고개를 떨구면 선배가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미안, 장난이 너무 심했다...”

“아니, 그게 아니에요. 저 괜찮은데. 정말로, 그런 게 아니고요,"

 

선배의 말을 끊었다. 속사포처럼 부정해버렸다. 그도 그럴것이, 방금 전까지 실컷 곤란하게 만들던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성실하게 사과해오면, 괜히 내 쪽이 미안해지는 것이다. 눈물이 멈추지 않는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강하게 고개를 젓는 것만으로는 전해지지 않겠지. 

말하지 않으면 __ 모른다.

말을, 잘 할 수 있을까.

자신은 없다. 이 감정들은 단 한 번도 언어로 태어난 적 없었다. 

 

숨이 막혔다. 왜 전화할 수 없었는지 설명하려던 선배의 기분도 이렇게 아득했던 것이리라. 그렇게 확신하면 할수록 코끝이 더 찡해져 왔다. 후두둑, 눈가에 고였던 눈물이 방울져 내릴 때마다 선배는 말없이 손으로 닦아주었다. 모자 같은 것 말고 손수건이나 챙겨올 것 그랬어.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선배가 훔쳐주는 손길을 느꼈다. 그는 나를 재촉하지도, 이유를 묻지도 않았다. 그 점이 좋아서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침묵을 깰 때까지 선배는 나를 기다려 주었다.

신데렐라는요, 동화잖아요. 마법 한 번 부리니까 꿈이 이루어졌어요. 그런데 현실에선 동화같은 삶을 살 수 없잖아요. 마법도 없고, 꿈도 이루어지지 않아요. 해피엔딩은 없었어요. 그래서 신데렐라가, 동화가 왠지 싫어서." 

 

그래서 눈물이 나왔나봐요, 웃기죠.

살짝 딸꾹거렸지만 그래도 단숨에 말해버렸다. 중간에 조금이라도 멈추면 그대로 무너져 버릴 것 같았다. 그렇게 말한 것 치곤 너무나 한심한 이유여서, 선배의 웃거나 혹은 어이없어하는 반응을 기다렸다. 그러면 나도 그냥 장난이죠, 괜히 심각해졌다, 하며 구렁이 담 넘듯 넘어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떤 것도 예상한 대로 되지 않았다. 선배의 눈빛은 평소보다 유난히 깊었고, 무거운 그림자를 담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슬픈 듯한 표정에 뭐라 말할 수 없이 가슴이 시려왔다. 

"그래, 그렇구나...”

신중하게, 그는 말을 아꼈다.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당연하다는 듯이 편안한 공백이 나쁘지 않았다. 

 

“있잖아, 그래도. 그냥 동화였다고 해도 말야. 그래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도 말이지.”

선배가 잠시 멈추었다.

그 짧은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던 것은 왜일까.

”’꿈’을 꾼 것만으로도 대단해. 잘 한거야.”

선배가 속삭이며 덧붙였다.

세상에서 가장 상냥한 목소리로, 

마치 토닥이듯이.

__

 

 

 

__잘 했어, 특대생.

 

모두가 그렇게 말했다. 특대생, 특대생쨩, 특대생상, 이름(ひかり)을 잃고서 오로지 ‘특대생’으로만 살아야 했던 시절. 실체도 그림자도 없는 소문이라는 놈을 마주했을 때도, ‘특대생’은 이겨내야 했다. 너에 대한 루머가 사실이든 아니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성실하게, 그저 앞만 보고 나아가면 ‘잘 하는’ 거야. 모두가 말했다. 

 

해명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는데 강함은 증명해야 하는 부조리 속에서 냉정할 수 있을 만큼 어른이 아니었다. 나는 주변의 평가와 시선에 인생을 걸 수도 있었을, 아직 열일곱에 불과한 평범한 ‘아이’였다. 의혹과 모욕을 만회할 수 있다면 악마와 손이라도 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잔뜩 웅크린 채 불행에 나를 내맡길 수는 없었다. ‘잘 한다’는 말이라도 들어야만 하는 것이 ‘특대생’의 존재 가치일 것이다, 그렇게 납득했다. 

 

흙을 털고 혼자 일어나서,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길을 무작정 걸었다. 그 끝이 어디든, 일단 앞을 향하면 ‘잘 했다’고 다들 말해줄 테니까. 두려웠다. 앞에 무엇이 나올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점점 내리막길 아래로 걷고 있어서, 결국 바다의 물결 속으로 깊이 잠겨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에, 두려웠다. 모두가 고생해서 준비한 그랑 유포리아가 엉망이 되어버릴 거란 사실을, 해명하고 결백을 증명할 기회도 영원히 잃고 말 것이라는 잔혹한 확신을. 열일곱의 나는 감당할 수 없었다. 짓눌려서, 숨이 콱 막혀서,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잘 했다고 말해주는 선배의 상냥함이 한발 더 멀게 느껴지는 것은 그 때 모두의 목소리와 겹쳐졌기 때문일까. 공기가 따뜻해졌는데 마음은 이상하게 굼틀거렸다. 선배의 표정이 가슴에 잔상으로 남아, 조금씩 파장을 일으켰다.

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괜한 이야기를 했구나 싶어 후회했다. 이건 전혀 기특한 이야기가 아니다. 꼴사납게 하소연하며 징징거렸을 뿐이다. 그런 걸 위로랍시고 받아도 되려 비참해질 뿐이다. 가슴이 욱신거려서 숨이 탁 막혀왔다. 내 안 어딘가에서 주체할 수 없는 서러움이 반발처럼 일어났다. 

‘꿈’을 꿔서 무엇이 해결되었단 말인가. 꿈 속에서 노래하는 미래란 희망 같은 것이 아니다.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절망 뿐이었다. 그 암울함의 압력을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나도, 아마도 선배도. 

잘 했다구요. 선배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어요.

결국, 혼자서 떠난 주제에.

나를 남겨두고.

‘있잖아, 나도 편입생이야. 우린 닮은 점이 많아.’ 

그렇게 먼저 다가온 건 선배였다. 우리가 얼마나 동족인지 강조했던 것도 선배였다. 오로지 성우가 되기 위해서 편입한 호세키가오카의 이방인 둘. 선배의 행보에 나는 분명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우리는 같은 사람들이니까. 외부에서 온 이방인이니까, 섞이지 못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어딘가 안심하는 내가 있었다.

선배도 떠났잖아, 나도 돌아가도 돼. 평범한 생활로. 

 

그러니까 내가 학교를 떠나기로 한 건, 모두 선배 탓이란 말이에요.

 

결정을 못 하면 이렇게 세상을 살기가 편리하다. 뭐든 남 탓을 하면 된다. 5년이나 지났는데 나이만 먹고 내면은 하나도 따라오지 못해서, 여전히 미루고 싶은 자신이 있었다. 내가 잘못된 게 아니라고, 선배가 나빴다고. 전부 선배 때문이라고.

그렇게 하면, 도망가도 괜찮을 것 같아서.

 

“그런 거 자기 합리화예요. 너무 무책임한 말이라고요. 예전이라면 믿었을지도 몰라요. 열심히 하면 된다, 앞만 보고 나아가면 된다, 재능이 있으니 될 것이다. 꿈을 꾸는 것만으로도 가능하다. 다들 그렇게 말했어요. 그런데 아니었잖아요. 그랑 유포리아니, 특대생이니, 신데렐라니 그런 것 다 의미가 없었어요.”

나는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내용과 말투가 어긋나서 마치 b급 성장소설이라도 소리내 읽고 있는 것 같았다. 뱉고 나면 후회할 말을 인간은 왜 하는 걸까. 천천히, 천천히 침잠해갔다. 화를 내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참담함에 온몸이 아파와서 그저 울고 싶었다.

 

문득 그랑 유포리아를 준비하던 때부터 단 한 번도 제대로 운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슬퍼서가 아니라 그저 그 행위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여러 가지를 핑계로 삼아, 내심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으리라. 선배는 기꺼이 대나무 숲이 되어 주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를 매도하고 있다. 암울함이 사방에서 터지고,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이 눈물처럼 방울져 내리는 것 밖에 없었다.

 

버킹엄 궁전을 둘러싼 공원의 벤치 위로 정적이 감돌았다.

맺힌 방울 사이로 선배의 눈을 들여다보고서야 알았다. 그는 슬퍼하고 있었다.

 

정작 나는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 

선배가 왜 다시 극단으로 돌아갔는지. 무슨 사정이 있었고, 어떤 기분이었는지.

이해하려고 한 적도 없는 주제에 동족이랍시고 실컷 선배 핑계를 대는 것이다.

 

완패다.

어딘가에서 지고 돌아온 주제에 선배에게 화풀이나 하고,

또 이렇게 아직도 내리막길을__

 

“아,”

 

닿는 느낌에 문득 고개를 들자 선배의 따스한 손이 내 뺨을 감싸고 있었다.

이런 나에게도 그는 한결같이 다정했다. 쓸데없이 성실하게도.

 

"무서웠던 것 아닐까? 꿈꾸던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상처받는 것이. 사실은 이건 전부 동화였다고 말하면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 누군가는 그럴거야, 그거 도망가는 거라고. 그런데, 난 도망가는 거 나쁘다고 생각 안 해. 필요하다고 생각해.”

 

의외로 선배는 선선히 웃었다.

 

“버거운 걸 굳이 짊어지고 가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나사렛의 예수도 아니고, 죽을 것처럼 괴로우면 십자가를 내려놓고 도망가도 되는 거야. 인간이란, 그런 거니까.”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웃음이 어딘가 괴로워 보여서. 

 

“마주해야만 해결되는 트라우마 같은 건 없어. 굳이 끄집어내면 준비되지 않은 마음은 다시 똑같은 상처를 받는대. 그냥 두면 언젠가 자연스럽게 사라지거나, 시간이 지나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때가 꼭 오니까..”

 

__ 라는 건, 내 얘기네, 하고 덧붙이는 선배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알고 있다.

자신의 노골적인 말에 깊게 상처받은 것은 오히려 나 자신이었다. 

 

 

 

【마음에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위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 그런 의미에서, 공주님을 위한 마법의 시간."

 

선배가 자켓 안주머니에서 트럼프 카드 한 장을 꺼냈다.

저 카드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다이아몬드 세븐.”

카드를 뒤집음과 동시에 나는 중얼거렸다. 

 

 

"마법은 못 부린다면서."

 

 

 

 

【그 상처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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