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kari & mate
森重 優那
2화
태연하게 처음 뵙겠습니다 아마네 히카리입니다, 같은 인사를 나눌 기분이 들지 않았다. 다행히 그녀는 늦잠을 자는 것 같았고, 부엌에 들어가는 선배와 마주쳤다.
"좋은 아침. 차 한잔 할래?"
나는 칫솔에 치약을 짜고 있었다. 이를 닦고 나서 먹으면 뭐든 맛이 없다.
하필 지금 묻는 것조차 나를 놀리는 것 같았다.
"여어, 선배. 어젠 재미 좀 봤고요?"
"그러니까, 아니라고. 그 불량배 같은 말투는 뭐야."
커피? 차? 아니면 주스? 같은 걸 묻는 선배에게, 전 여자친구를 재워주는 건 대체 어느 나라 쿨함이에요, 칫솔을 입에 물며 웅얼거렸다. 안 들려, 뭐라는 거야. 피식거리는 선배와의 대화가 마치 만담 같아서 현기증이 일었다. 막장 드라마 같은 설정 속에서도 선배와 나는 이렇게나 명랑한 대화를 나눈다.
"루왁 커피로 하자."
"그거 고양이 똥이잖아요." 나는 정색했다.
"비싼 거라고." 그가 찬장에서 커피 필터를 꺼내며 말했다.
괜찮아요, 선배나 마셔요, 하고 나는 양치를 끝내러 화장실로 향했다.
—
일찌감치 플랫을 나왔다. 선배는 전 여자친구를 배웅하고 오겠다고 했다.
연속 이틀을 선배의 그 멍텅구리 같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런던 시내를 쏘다닌 것이 못내 분했다. 보상심리로 잔뜩 차려입은 채 포토벨로 마켓을 걸었다. 한참을 걷다가, 눈에 띄는 간판이 어딘가 익숙한 가게를 발견했다. 'The Nottinghill bookshop'이었다.
선배의 플랫 거실에 영화 ‘노팅힐’의 포스터가 있었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영화다. 왜 그가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세상을 피해 숨겨 달라고 찾아온 사람이다. 사랑을 도피처로 이용하는 데도 좋아질 수가 있을까?
서점의 커다란 창문으로 들어온 빛이 책더미 사이를 비집고 천 갈래 만 갈래로 퍼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부옇게 빛나는 그것을 바라봤을 때, 'Les miserable(레미제라블)'이 시야에 들어왔다. 선배가 출연하는 뮤지컬의 원작이다. 모를 리 없다. 여행을 계획하면서 이미 수십 번을 질리지도 않고 찾아본 것이다.
선배가 연기하는. 선배가 나오는.
끌려가듯 손에 들고 아무데나 펼치면 익숙한 구절이 나온다.
【마음에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위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상처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다】
상처를 입은 채 허겁지겁 도망을 간다. 내 몸을 숨겨 줄 성직자의 집, 혹은 노팅힐의 서점을 찾아 떠돌아다닌다. 파리, 두브로브니크, 잘츠부르크, 로마, 런던. 세상에는 숨을 곳이 이토록 많다. 가급적 고향에서 먼 곳으로 간다. 이윽고 도피처가 되어 주겠다는 남자가 나타난다. 재미없는 농담을 좋아하고, 다정한 미소를 가진 사람이다.
도망이 지긋지긋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이 보고 싶은 것이다.
슬프게도 정말 어쩔 수가 없다.
선배에게 문자를 보낸다. 지금쯤이면 배웅이 끝나고도 한참이 지났을 것이다.
「모뉴먼트 역에서 만나요」
급히 역으로 향했다.
—
선배와 해 질 녘의 템즈 강변을 함께 걸었다. 노을을 받아 반짝거리는 풍광이 멋진 야외 펍을 발견하고 자리를 잡았을 때, 선배가 여름 즈음엔 파리로 갈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정식 단원으로 고용되면 극단에서 연수 차 보내주는 것이라고 했다.
“와, 타이밍. 저도 7월엔 파리에 있을 텐데."
"정식 단원이 된다면 나도 그때쯤이겠네."
"파리에서도 재워주실 거죠?”
"그러면 좋겠지만, 아직 어떻게 될 지 몰라."
"결과는 언제 나와요?"
"다음 주 금요일."
"그 때쯤이면 전 독일에 있겠네요."
아쉬운 듯 중얼거리는 나를 선배가 빤히 바라보았다. 템즈 강의 석양이 그늘져 길고 깊은 시선이 숨막혔다. 침묵이 이어지는 것이 어색해서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극단 생활은 어때요?"
"나쁘지 않아. 나는 여행 온 거 아니니까, 여기."
"결과 나오면 앞으로 더 바빠지겠네요."
"글쎄."
선배의 눈이 더 깊어졌다.
"너,"
"왜요?"
"여행 어디 가는지, 뭐 먹는지, 누구 만나는지. 궁금하니까 매일 연락해."
"네?"
"물론 나도 할 거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얼굴 표정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부끄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당황할 필요는 없다. 나에게만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닐 터다. 런던 가는데 재워줘, 라고 두 사람은 연락을 쭉 주고 받았겠지. 나와는 5년이나 서로 모르는 채였는데.
일부러 그런 생각을 떠올려도 설렘은 가라앉지 않았다. 이런 순간에는 고약한 말을 해야 조금이라도 덜 억울해진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럴게요 그럼. 오늘 얘기도 해 드릴까요?"
"응, 해봐. 궁금해."
"노팅힐에 갔다가 어떤 남자를 만났어요. 아는 사람들 집에 묵어가며 6개월 동안 유럽 여행한다고 했더니, 자기 집에 방이 많으니까 자고 가래요."
"경각심이 없는 건 여전하구나."
"선배네 집에서도 잤잖아요. 3일이나."
전 여자친구도 재워주는 선배가 할 말은 아니다. 누구나 부탁만 하면 집에 들여보내 주는 사람이지. 나 역시 선배의 세상에선 지나가는 행인 1인 것이다. 은식기를 가져가도 나는 당신을 재워주겠습니다, 하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 선배에게, 아무나 중 하나인 나는 존재감이 작아져서 조금 슬펐다.
"내가 나쁜 사람이었다면 어쩌려고? 나도.."
"일단은 남자라고요?”
"선배니까 괜찮다고?”
둘이 동시에 말해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 나 따라 하지 마. 아니, 선배가 따라 했잖아요. 두 사람의 그림자가 강변에 일렁여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던 선배가 잠시 말을 멈춘 채 노을을 바라보았다.
"알아. 네가 좋은 사람이니까 곁에도 좋은 사람들만 모일 거야. 그러니까 예전부터 걱정하지 않았어. 아아, 물론, 걱정은 하는데."
걱정을 했다는 건지, 걱정하지 않았다는 건지.
선배의 문장들은 도통 모순 투성이었다.
"그러니까 거긴 가지 마."
나도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안 가요. 선배, 맥주 김 다 빠져요."
—
기묘한 밤이 있다.
몇 차원이라도 이어진 것 같은 밤이다. 그런 때는 꿈과 현실의 경계 어딘가를 어둠이 지배하고, 중력마저 힘을 잃는다. 성큼 다가온 이별의 무게를 가늠한다. 선배와의, 마지막 밤.
우리는 소파에 앉아 와인을 마시며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파리에 대해 얘기했다. 물랑루즈도, 노트르담도, 오페라의 유령의 배경이 된 오페라 하우스도 가 보자고, 우리가 좋아하는 뮤지컬들을 늘어놓았다. 언젠가는 선배가 거기에 출연할지도 모르니까, 하는 행복한 상상을 했다.
"런던 전에는 어디 어디 갔어?"
"네덜란드에서 튤립 축제 봤어요. 그리고 벨기에로 가고, 거기서 비행기 타고 스코틀랜드에 갔어요. 에딘버러부터 쭉 여기까지 내려온 거예요. 아, 선배는 유럽 다른 데에서 산 적 있어요?"
재잘거리는 나를 앞에 두고 선배는 묵묵히 새 와인을 땄다. 선배 앞에서는 유독 말이 많아진다. 그처럼 제대로 대화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이리라. 따스함이 섞여있는 시선으로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네 얘기가 정말로 듣고 싶어서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을 한다. 거기엔 진심 어린 공감과 조언이 따라붙는다. 가끔은 재미없는 농담도. 그것은 흔한 자기 과시도, 충고를 가장한 기만도 아니다. 선배는 내가 본 중 가장 성실하고 진지하게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다.
"응, 몇 년 전에. 이미 멀리까지 왔는데도 또 떠나고 싶어져서, 지도에서 아무 곳이나 찍어서 일 년 정도 있다가 왔지."
"거기가 어딘데요?"
"리투아니아, 라고 들어봤어?"
"잘 모르겠어요."
"나도 몰랐어. 좀 생소한 곳이잖아. 그래서 가기로 한 거지만."
선배는 말끝을 흐리며 찰랑거리는 잔을 응시했다.
그 기분을, 나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모르는 것 투성이라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곳으로 혼자 떠나고 싶다고. 그런 강렬한 감정이 들 때가 있다. 현실이 견디기 벅차서 일단 벗어나는 쪽이 훨씬 나은 경우이다. 한참 후에 돌아가 보면 과거의 흔적만 남아 있다. 그제야 돌아볼 여유가 생긴다. 드디어 끝났다! 고.
나도 떠나고 싶었다.
선배는요?
선배는, 어땠나요? 왜 떠났어요?
"yes, 가 리투아니아어로 뭐예요?"
여전히 물어볼 수 없었다. 그저 할 수 있는 질문은 이런 바보 같은 것 밖에는.
"테입(tape). no는 네(ne)."
"네, 재밌다. 그거 우리도 쓰는 말이잖아요."
"발음이 좋은데? 소질 있어. '테입' 해 봐.”
"테입."
“아냐. 너무 귀여워."
"그럼 좀 더 낮게? 테잎."
"그렇게 엄숙할 필요는 없어."
"테-입, 테입, 테입.."
"하하하, 어떻게 해도 귀엽잖아."
"테입!! 어때요? 이제 좀 낫죠."
"아니, 다 너무 귀여워."
"안 할래요. 앞으로 네(no)만 할 거예요, 네(no).”
“that’s lovely.”
영국에서는 흔하게 쓰이는 추임새다. 그의 lovely는 결코 ‘사랑스럽다’는 뜻이 아니다. 손을 빌려준다는 표현 만큼이나,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이다.
선배는 정말로 런던 사람이 다 됐다. 이렇게 가슴 떨리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줄 아는 것이다. 문득 어제 엿들은 대화가 떠올랐다. 그녀에게도 이런 말을 했겠지. 아무 의미 없는 말일지언정 결코 유쾌한 상상은 아니었다. 내가 모르는 둘의 세상, 둘의 대화. 그날 밤 그건 아마도 리투아니아 말이었을 것이다. 거기서 만난 사람이겠지. 결국 이런 생각으로 귀결되는 것을 보면 질척거리는 것은 내 쪽일지 몰랐다.
“그럼 아쉬 타베 밀류, 해 봐.”
“아쉬 타베 밀류.”
“발음이 별론데.. 다시 해 봐.”
“아쉬, 타베, 밀류.”
“다시.”
“아쉬, 타베... 선배,”
“아냐, 다시 말해줘.”
“선배, 이게 무슨 뜻인데요?”
“I love you.” 그가 대답과 동시에 겨우 참았다는 듯 웃음을 뿜어냈다.
“선배! 네(no)!! 안 해요!”
"으하하, 거절당했다!" 그가 깔깔거리며 가슴 한 쪽을 부여잡고 총 맞은 시늉을 했다.
“엑, 선배 취했어요?"
둘러보면 빈 와인병이 소파 옆에 가지런히 숨겨져 있었다. 내가 떠드는 사이 아무렇지 않은 척 전부 다 마셔버린 것이다. 심지어, 그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소파 아래 사각지대에 세워놓는 치밀함까지. 이런 부분에선 쓸데없이 성실한 사람이다.
술, 언제 다 마셨어요! 하고 나는 다소 흥분해서 외쳤다.
“왜, 걱정돼?”
“아니, 혼자 다 마시면 어떡해요? 내 건요?”
“그쪽이었군.”
미안 미안, 한 번 마시기 시작하면 못 멈추는 타입이야. 선배가 낄낄거리며 손을 내저었다. 다음에 술 살게, 약속. 그런 진지한 말을 장난스럽게 하는 선배가 그제야 조금 취해 보였다.
"선배 정말 티 안 나네요."
"그치, 취해도 티가 안 나.”
“장점이네요. 아무도 취한 줄 모르잖아요.”
“단점이야. 모르니까 다들 자꾸 먹이잖아.”
선배가 불쑥 코 앞으로 다가왔다.
“특대생쨩은 얼굴 빨개졌네.”
“저는 티 나는 타입이에요.” 갑자기 얼굴을 들이밀어서, 라고는 말하지 못했다.
“좋은 거야, 다 드러나는 건.”
“숨기고 싶을 때도 있어요.”
지금 같이 얼굴이 가까울 때 특히 그런 능력이 간절했다.
“그거 별로 안 좋아. 가식처럼 보인대.” 선배가 웃었다.
"누가 그런 말을 해요?”
"누구라니. 특대생쨩도 그랬잖아. 웃는 얼굴이 거짓말 같다고."
선배의 웃음이 점점 잦아들었다.
"제가요?"
"응."
"우와, 그런 말을 들었으면 연락 안 할 만하다."
이번에는 내가 웃었다. 민망한 상황을 벗어나려는 방편이었다. 웃는 얼굴이 거짓말 같다니, 그런 말을 언제 했더라. 선배의 목소리는 파랗고, 깊은 바다 같았다. 목소리가 바다에 잠겨, 가라앉았다. 그렇게 쭉 가라앉으면 다신 떠오르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사과조차 할 수 없었다.
선배는 묘한 사람이었다. 가식은 없는데 진심을 읽을 수가 없었다. 언제나 친절하고 다정했지만, 어딘가 선을 긋는 것 같았다. 선을 한 발 앞에 두고 망설이면 선배는 알아차렸다는 듯이 말했다. 하하, 농담이야!라고.
그럴 때는 선배의 목소리처럼 파란 기분이 되었다.
한 번은 선배가 체포해버린다는 말을 했는데, 꼭 청혼인 줄로만 알았다. 당시 즐겨 보던 만화에서 주인공이 체포한다고 선언한 것을, '이건 프로포즈임에 틀림없다'고 신과 둘이 호들갑을 떤 것이다. 그러니까, 선배가 농담이라는 말을 덧붙였을 땐 왠지 서운했다.
넌 여기까지라고 하는 것일지 몰랐다.
농담이야, 같이 뭐든 없던 거로 해버리는 말은 너무 쓸쓸하다. 말도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 편이 차라리 안심이다. 선배가 5년 동안이나 연락이 없었던 건 기억도 안 나는 언젠가 ‘웃는 거 거짓말이죠’라고 말한 내 탓이라고 생각하면 편리하다.
"아니, 그런 게 아냐."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배가 따라 웃었다. 부스스 파도가 부서져 왔다.
"핸드폰 때문에 그래."
밤에 보면 너무 눈이 부시잖아. 알 수 없는 말을 노랫소리처럼 흥얼거리며 선배가 건배, 하고 와인잔을 들었다. 어딘가 괴리감이 느껴졌다. 건배할 술이 안 남았다구요! 하고 맞받아쳤다. 일단 지금은, 선배의 독주를 막는 것에 집중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사람은 종종 속내를 감추기 위해 활발함을 가장할 때가 있다. 그가 나와 같다면, 그럴 때는 모른 척해주는 것이 낫다. 농담이라도 던지면서 말이다. 그러니까, 선배가 와인잔을 입가에 가져가기 전에 빼앗았다. 마지막 간식을 압수당한 아이처럼 황망한 표정을 지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방인(프랑스 소설. 눈이 부셔서 사람을 죽인다) 이에요? 너무 눈부셔서, 라니."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이런 때는 평온하게, 성실하게 아무 말을 한다. 그것이 내가 알고 있는, 상대를 배려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아니, 그건 아닌데,"
선배는 어딘가 복잡한 눈치였다. 어쩌면 단순히 와인을 빼앗겨서 일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별 것도 아닌 듯이' 이 상황을 넘기고 싶은, 나의 경망스런 소망에 불과했다. 웃는 모습이, 거짓말 같은, 선배,라고. 내가 분명 그렇게 말했다고.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요.”
선배는 대답이 없었다.
내가 빼앗아 든 와인잔을 묵묵히 바라보다 이내 먼 허공을 응시했다.
그 시간이 길게 느껴져서 온몸에 쥐가 날 것 같았지만,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선배가 말을 해도 좋고, 말을 하지 않아도 좋아요. 그런 표정을 짓는 데 굉장히 애를 썼다. 아는지 모르는지 선배의 눈길이 거실 바닥을 향했다. 그러고도 얼마간 더 시간이 흘러서야, 비로소 선배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입을 여는 것이었다.
깊은 바다로 뛰어들기 직전처럼.
“자, 봐봐.”
선배가 핸드폰을 꺼내 들어 익숙하게 번호를 눌렀다.
xxx-xxxx-xxxx
아마네 히카리
망설임 없이 숫자를 누르는 것에는 내심 놀랐다. 선배는 내 번호를 외우고 있었다. 얼마나 자주 눌렀던 걸까. 그의 목소리가 담담하게 거실을 울렸다.
“이제 통화버튼만 누르면 되잖아. 그런데 보이는 이름도 빛(히카리)이고, 물론 이건 농담이지만, 너무 눈이 부셔. 그걸 보고 있으면 좀 망설여지는 거야. 왜 연락했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그런 생각을 할 때 마침 딱 화면이 꺼져. 신기하지? 쓸데없는 짓 하지 마, 하고 타이밍 좋게. 그럼 아, 큰일 날 뻔 했다. 하고 정신이 번쩍 들어. 괜히 새벽 감성으로 전화할 뻔 했다__ 구남친처럼."
"그냥 아무것도 안 해서 화면이 꺼진 거예요. 그런 거면 낮에 했으면 됐잖아요.”
구남친 같은 짓은 이미 전 여자친구랑 했잖아요. 튀어나오려는 진심을 밀어 넣고 단호하게 응수했다. 그러자 어울리지 않게 선배의 표정이 서글퍼졌다.
어쩔 수 없다. 핸드폰 불빛 때문에 그랬다니, 이름(ひかり)으로 말장난하는 수준이다. 그런 이유로 5년이나 모르는 사람으로 지내다가 그렇게도 쉽게 안녕, 이라고 해오면 당황한 내 쪽이 바보가 된다.
그러나 정말로 분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배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막연한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상대가 나를 이해해 줄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자라나,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그대로 상처 입는다. 그런 감정을 설명할 자신은 없다. 제멋대로 품은 기대를 배신당하고 싶지는 않지만, 애써 납득시키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마침 좋은 핑계거리가 생기면 차라리 다행이다, 싶어서 기다렸다는 듯 포기해 버린다. 상대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니까, 확신이 없는 한 그대로 두는 게 낫다고.
"하지만.. 시차 때문에 선배가 낮에 전화해도 저는 밤이었겠네요."
나도 마찬가지다.
선배의 심드렁한 반응을 보느니 안부 따위 모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두려운 것이다. 항상 그와는 정반대로 달려나갈 준비를 한다.
“언제 해도 밤이네요. 선배에게든, 나에게든.”
그래도 나는 선배의 기대를 저버리진 않았을 텐데. 그것을 모르는 선배가 측은해졌다. 물론, 그런 것을 그가 알 리 없다. 말하지 않으면 어떤 것도 전해지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선배는 나보다 낫다. 5년 만이든 바보같은 이방인 헌정사든 시도를 한 그가 대견했다.
“그래서 내가 영국에 올 때까지 기다렸구나.”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5년이나."
선배와 나 사이에는 밤처럼 깜깜한 공백이 있다. 화려한 미사여구를 잔뜩 동원하는 방법 같은 것은 모른다. 진심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보다 더 깊은 공감이 있다. 이상한 점에서 비슷한 사람들. 앞이 보이지 않는 밤을 영원히 헤매는 사람들. 나는 그를 알 수 있었다.
"하하, 역시 특대생쨩. 잘 통한다니까.”
"음, 조금 다른 얘기 같은데요.”
"응, 그런 거 그리웠어."
선배가 말을 끊고 갑자기 가까이 다가와서 엉겁결에 빼앗았던 잔을 높이 들었다.
“이게 마지막 잔이에요.”
“특대생쨩 입술이 새까만데.”
“선배도 그렇다구요.”
와인을 그 정도로 마시면 입술이 물드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본인이 전부 마셔놓고 멋없는 말이나 한다. 남의 입술을 민망하게 뜯어보고 하는 말은 전부 멋이 없다. 정말로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다.
샐쭉해진 시선으로 그를 한 번 마주하고, 피하고, 와인빛으로 물든 입술을 흘깃 훔쳐보다가 다시 피했다. 멀리 거실 창을 따라 굴러가던 시선을 옮겨 다시 선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여전히 상냥한 눈빛을 보면 어딘가 용기가 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__ 말을 하지 않으면 모른다.
나는 천천히 입을 뗐다.
"연락 줘서 고마워요."
"그치?" 선배는 다정한 눈을 하고선 잘도 뻔뻔스러운 대답을 했다.
"우와, 저 여유."
정색하는 나를 보며 선배가 큰 소리로 웃었다. 너무 신나게 웃어서 나까지 같이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싶었지만 얼굴 근육이 마음대로 움직였다. 웃다가 웃다가 잦아들 무렵 선배가 하아, 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밤이 안 끝나면 좋겠다."
그가 선명하게 소곤거렸다.
밤은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 선배는 선 '밖'으로 물러나지 않았다.
"취했다 선배. 이거 내가 마실게요.”
나는 들었던 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화제를 돌렸다. 그 다음에 나올 말이 겁났다. 선을 넘어오지 마세요. 계속해서 경고해왔던 건 내 쪽일지도 몰랐다. 선배의 입이 다시 열리기 전에 나는 쭉 잔을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