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森重 優那

 

Invisible_Beau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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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소파는 작고 단단하다. 선배의 포근한 그것과는 다르다. 비슷한 것을 찾고 싶어서 한참을 돌아다녔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어떻게든 그 위로 눕는다. 고양이처럼 둥그렇게 몸을 말면, 이내 머리를 넘겨주는 손길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전부 당신 때문이야. 

 

그런 핑계를 대면 이해할 수 없는 자신도 이내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마침내 여명이 빛나는 창문 위로, 런던의 추억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외로움에 지쳤던 지난 밤을 위로하듯이. 

 

아쉬, 타베, 밀류 (As tave milieu)

조용히 중얼거리자 수 갈래의 빛이 거실을 파고든다.

 

안녕, MY LONDON GUY

1화

모뉴먼트(Monument) 역의 개찰구에서 캐리어를 끌어냈다. 주변을 둘러보면 스산함이 전신을 훑었다. 나는 긴장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선배를 만난다. 

5년 만에.

 

 

"특대생쨩.”

 

 

조금은 나른하고 어딘가는 다정한 그 목소리의 주인을 나는 안다. 

시선을 들어 올렸을 때 눈에 들어올 모습도.

 

"유우나 선배."

 

나도 모르게 머리를 매만졌다. 선배는 여유롭게 걸어오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엄청난 짐이네."

"긴 여행이니까요." 

 

선배는 캐리어를 쥔 내 손을 꼭 잡았다.

 

"Do you need my hand? (내 손 줄까?)"

"Are you an English? (영국 사람 다 됐네요.)”

"Nope. A London guy. (아니, 런던 사람이야.)"

 

그가 웃었다. 영국 표현은 생소했지만, 도와준다는 말이라기엔 너무 로맨틱해서 이대로 손을 잡고 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언젠가의 축제 때, 떨어지면 안 되잖아, 하고 내 손을 잡았을 때처럼.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단순히, 영국식 표현일 뿐이다. 

 

"이리 줘."

 

캐리어를 빼앗긴 빈손이 덩그러니 갈 길을 잃었다.

짐을 덜었을 뿐인데 마음도 가벼워진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다행이다. 선배를 만났어도 나는 생각보다 훨씬 말을 잘했다. 

 

"이노리가 안부 전해 달래요. 선배 생일엔 런던에 와서 축하해 줄 수 있도록 노력하겠대요."

"그러면 좋겠는데. 가미는 어떻게 지내?"

"만난 적은 없지만, 그대로인 거 같더라구요.”

 

선배처럼요.

 

"트..특대생 상! 이렇게.”

"하하하, 지금 그거 완전 똑같아!"

 

 

 

 

 

 

그 날 저녁은 뉴캐슬(잉글랜드 북부)의 한 펍에 있었다. 숙박 예산이 빠듯해서 머리를 싸매다가 술을 마시러 왔다. 3일은 런던에 사는 친구가 재워주기로 했는데도 3일이 더 비었다. 

 

밤은 떠들썩하고 사람들은 행복해 보였다. 일상을 피해 도망온 나만이 낯선 곳에서 현실의 무게를 재고 있다. 선배에게서 갑작스러운 연락이 온 것은 그런 상념에 잠겨 체리 맥주를 홀짝거릴 때였다. 

 

「오랜만이야. 지금 여행 중이라며?」

 

모르는 연락처라고 생각했을 때 프로필 사진이 눈에 띄었다. 어딘가 비뚤어진 안경 그림이다. 예전에, 아마 고등학교 즈음 이것을 그렸던 기억이 있다. 농담을 걸어오는 선배에게 그날따라 심술을 부리고 싶어서 앉은 자리에서 휙휙 낙서한 것을 선물이에요, 하고 건넸다. 정작 그것을 받고 선배는 퍽이나 좋아했다. 내가 그린 안경이 나에게 오랜만이라는 말을 한다. 

 

「네. 잘 지내세요? 선배는 런던이죠?」

 

누구라는 말도 없이 대뜸 안부부터 묻는 그 자신감에 실소가 나왔다. 하지만 더 어이가 없는 것은 이것이 선배임이 틀림없다고 확신하는 나 자신이었다. 

 

선배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는 모른다. 졸업 후 런던의 한 극단에 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그뿐이었다. 5년 동안이나 교류가 없었다. 선배가 어떻게 내 연락처를 알았는지, 내 근황은 또 어찌 알고 있는지 잠시 고민했다. 아마 이노리가 알려줬을 것이다. 그래, 선배와 나는 제3자를 통해서나 생사를 확인할 수 있는 사이에 불과하다. 

 

「응, 그럭저럭 지내. 런던이지.」

 

5년의 공백이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대화는 평화롭다. 이런 점이 지독하게 불합리하다. 이 사람은 대뜸 하고 싶은 말을 한다. 앞뒤 설명은 생략하고 요점만 이야기한다. 끝에는 농담이야, 같은 말이나 붙여서 사람을 곤란하게 한다. 그러면 꽤나 고분고분한 나도 고약한 심술을 부리고 싶어지는 것이다.

 

「잘됐다. 좀 있음 저도 런던 가는데 재워주세요.」

 

절반은 넌지시 떠보려는 마음, 절반은 불합리에 대한 도발이었다.

 

「그래, 런던에 언제 도착해?」

 

그러면 시도조차 무색하게 흔쾌히 대답하는 것이다. 

 

「내일모레요. 너무 갑작스럽죠?」

「아니야 전혀.」

 

런던에 살면 다들 올 때마다 잘도 재워달라고 하지. 덧붙이는 선배는 분명 핸드폰 화면 너머로 웃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너스레는 상냥함인지, 짓궂음인지. 어느 쪽이든 예전과 똑같다.

 

나는 다르다. 예전보다 더 자랐고, 더 단단해졌다. 홀로 이렇게 긴 여행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선배와 함께 지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숙박비도 아낄 겸 겸사겸사. 자신이 내뱉은 터무니없는 말에 그렇게 적당한 이유를 붙인다. 아니면 체리 맥주가 너무 맛있어서 과음을 했고, 그게 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객기를 불렀을 것이다.

 

「나야말로 미안. 놀랐지, 갑자기 연락해서.」

「아뇨, 괜찮아요.」

「어떻게 지내나 궁금했는데 마침 영국이라길래.」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안경 그림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마침이라기엔 긴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어제 안녕, 하고 헤어진 것처럼 쉽게도 연락해서 이야, 우연이네! 하고 말하는 것이다. 궁금했다는 말이 이렇게나 쉬울 수 있다니 언어도단이다. 평온한 선배를 앞에 두고 나 혼자 당황하고 있었다.

 

「그랬구나. 근데 선배, 저 배터리가 다 됐어요...」

「아아, 그래. 출발할 때 다시 연락 줘. 기다릴게.」

「네. 연락할게요.」

 

배터리가 다 됐다는 것은 대충 둘러댄 말이다. 이 정도를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나? 선배처럼 아무렇지 않게 대화할 마음의 준비가 ‘아직’은 안 됐을 뿐이다.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이런저런 핑계를 끌어온다.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진정시키려 애쓰고 있을 뿐이다. 

 

그런 모습이 한심해서 크게 웃고 말았다. 이국의 여자 홀로 술을 마시다가 벌떡 일어나고, 이내 괴상한 웃음소리를 흘리는 건 그다지 유쾌한 광경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혼자만 설레는 자신이 불쌍해지고 만다. 나는 선배의 뮤지컬을 보기 위해 런던에 간다.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서 간다. 선배의 근황 따위 모른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나는 선배를 좋아했다. 

 

선배가 학교를 떠난 후, 나도 그곳을 떠났다. 

 

 

 

 

 

 

5월 중순의 런던은 아직 추웠다. 

 

"그거라도 덮어."

 

381버스를 타고 한 시간, 플랫에 도착했을 때 선배는 자신의 후드를 내주었다. 섬유유연제와 뭔지 모를 향기가 어렴풋이 뒤섞여 있었다. 선배의 후드티를 머리부터 뒤집어쓰고선 거실 한구석에 캐리어를 풀었다. 

 

"이거,"

 

여행객의 잠자리가 으레 그렇듯이 내가 묵을 곳은 선배의 거실 소파였다. 정확히는 소파라고 할 수 없는 그 고풍스러운 앤틱 카우치는, 영화 포스터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거실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모던한 플랫에서 이방인처럼 존재감을 내뿜는 그 이질적인 물건이 나는 꽤나 마음에 들었다. 선배는 빳빳하게 마른 침대 시트를 그 위에 깔고 있었다. 후드와 같은 냄새가 풍겼다. 

 

"선배 타입은 아닌데.”

"오, 잘 아네."

 

대답하며 선배가 베개와 이불을 가져왔다. 역시 빳빳했다. 나를 위해 이런저런 빨래를 하고, 팡팡 털어 햇빛에 말렸을 선배의 모습을 상상하니 이 소파만큼이나 어울리지 않아서 웃음이 나왔다. 그것들을 한쪽에 밀어두고 살짝 앉아보았다. 푹신해서 제법 기분이 좋았다. 

 

저, 정말 여기서 자도 돼요?

 

앉은 채로 소파 위에 털썩 쓰러졌다. 앞으로 3일간, 내 침대가 될.

은근하게 묻고 싶은 것을 참았다. 물어봤자 대답은 ‘물론’일 것이기 때문에. 

 

 

 

 

 

 

"뭐 먹을까?"

"선배가 정해요."

"손님이 원하는 대로 하자."

"여긴 주인이 더 잘 알잖아요.”

"Lady first."

 

__ 네에, 레이디. 

 

"mean guy. (치사해요)"

"정정할게. lady가 아니고 mean girl."

 

학창시절의 나는 주변에 따르는 것에 익숙했고 선배는 그런 나에게 맞춰주는 유일한 사람 같았다. 멋대로 테니스 코트 같은 데 끌고 가면 그가 곤란한 웃음을 지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서도 이내 제대로 라켓을 쥐고 착실히 상대해주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그런 류의 사람들이었다. 

 

선택이 어려운 사람들. 

남의 부탁을 들어주는 사람들. 

 

"격일로 해요."

 

결정을 못 할 때는 상대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점도 같다. 

 

"오늘은 선배가, 내일은 내가, 또 그 다음날은 선배가 정해요.”

 

선배가 기다렸다는 듯 좋아, 하고 동의했다. 뭐라도 제안한 것이 반가운 눈치였다. 이런 사람이 그렇게 무모한 결정을 했다는 걸 때론 믿기 어렵다. 

 

졸업 직후, 선배는 돌연 런던행을 선언했다. 성우 업계를 떠난다고 했다. 마침내 그가 다시 무대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왠지 마음이 가벼워졌다. 길고 긴 한숨이 나왔다. 머지않아 나도 진로를 바꾸었다. 평범한 고등학교에 전학해서 평범하게 친구를 사귀고, 평범하게 입시를 준비했다. 그 세계의 소식은 더는 모른다. 가끔 이노리의 연락을 받았지만, 모두의 안부는 묻지 않았다.

 

다만 종종 생각했다. 편입을 하면서까지 성우가 되겠다던 선배와 내가 결국 원래 세계로 돌아간 것이 어떻게 보일까. 그러다가 또 생각한다. 남의 시선이 뭐가 중요한가. 단지 선배도 나도, 본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간 것 뿐이다. 

 

선배와 나는 닮았다. 만담 같은 대화라든지, 할 말은 해야 한다든지, 그게 때론 짓궂어 보인다든지, 술을 아주 좋아한다든지, 고작 생일이 하루 차이라든지, 현명하고 추진적이며 쿨하기까지 한 사수자리라든지. 그리고 이런 드립들을 진지하게 내뱉는 점이라든지. 

 

"여기선 이름이 뭐예요?"

"유우나.”

"유우나?"

"완벽해, 바로 그 발음이야."

"본명 쓰는구나."

"그런데 다들 발음을 제대로 못 해서 지금은 그냥 ‘베티’야.”

"유우나랑 베티는 전혀 관계가 없잖아요."

"처음 여기 왔을 때 어떤 선배가, 이봐, 유워나. 아닌데요. 요-우나? 아뇨. 워아나? 아니에요. 그래, 그럼 베티? 네! 바로 그거예요! 해서 베티가 됐어."

"아하.”

"뭐야, 그 시시한 반응은." 

“오, 예쁜 이름이에요!”

“이제 와서.”

 

 

 

 

 

 

술로 시작해서 술로 끝나는 대화는 10시가 되자 멈췄다. 영국이 안 좋은 게 이거야, 술집이 열시에 닫는 거. 그러니까요, 이제 시작인데! 선배와 나는 쿨하고 현명한 사수자리답게 불평을 접어두고 조용히 가게를 나섰다.

 

"추워!"

 

가게 문을 밀고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 찬 바람이 비집고 들어왔다. 잠식하던 알콜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기껏 마신 술이 달아나는 게 아쉬워 나도 모르게 속사포처럼 중얼거렸다. 

 

"선배, 추워요, 춥다. 여긴 왜 이렇게 추워요."

 

무색하기 짝이 없는 선배의 후드에 푹 얼굴을 묻었다. 여전히 묘한 향기가 나고 포근했다. 

 

"5월의 영국은 아직 추워. 따뜻한 옷 좀 많이 갖고 오지.”’

 

선배가 훅 내 어깨를 끌어당겼다. 단단한 가슴 속에 안겼다.

 

"여기서 짐을 어떻게 더 싸요."

 

볼멘소리가 났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예상치 못한 이 상황에서 평정을 가장할 수 없었다. 선배의 품속은 너무나도 따뜻했다. 

 

"뉴캐슬도 너무 추워서 누가 안 입는 옷을 줬어요."

"그거라도 입고 나오지."

 

선배의 가슴으로 목소리가 울리는 것을 들었다. 시야가 가려진 공간에 내 심장 고동 소리만이 퍼졌다. 제발, 이 소리가 선배에게 전해지지 않도록. 

 

"런던 오면서 버렸어요. 짐도 많고, 빨간 후리스라서... 입으면 할머니 같아요.”

 

선배에게서 살짝 몸을 떼어냈다. 그 자리를 금세 찬 바람이 차지했다. 어딘가 휑한 기분이 들어서 기분이 묘했다. 한 번 안겼을 뿐인데도 그의 품이 내 것처럼 여겨졌다. 이상한 욕심을 떨쳐내려고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아, 아쉽네."

 

어느 쪽을 말하는 거예요. 

빨간색 후리스를 뒤집어쓴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몸이 떨어진 것이?

 

"what a mean guy."

 

짓궂다, 정말로.

 

 

 

 

 

 

플랫으로 돌아가는 길에 와인을 두 병 샀다. 영국은 길에서 술을 마시면 안 된다든가, 그런 고루한 생각일랑 접어두고 걸어가면서 사이좋게 한 병씩 나눠 마셨다. 술이 들어간 선배는 왠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아마 술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내일 전 여자친구가 런던에 놀러와.”

 

그런 기분은 곧 와장창 깨지고 말았다. 이번에는 평정을 가장할 수 없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선배를 바라보았다. 하하, 농담이야, 으레 그랬듯이 그 말을 기다렸다. 기다려도 그는 원하는 답을 해 주지 않았다. 

 

“전 '여자친구' 라고요?”

“응, 원래 거실에서 재워주려고 했는데 갑자기 네가 온다고 해서. 어쩔 수 없으니까 방 침대라도 내줘야지. 

 

그냥 오지 말라고 하면 되잖아요.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겨우 삼켜냈다. 태연하게 말하는 선배가 너무 ‘쿨’해서 정말로 런던 사람이 다 된 것 같았다. 스스로가 상당히 개방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아직 이런 부분은 이해하기 어렵다. 내가 고지식한 건지, 유럽은 원래 이리도 자유분방한 건지. 오소소 몸을 떨었다. 영국도 춥고, 런던도 춥고, 밤도 춥고, 선배도 춥고. 전부 추웠다. 

 

“어쩐지 익숙해 보이더라.”

"뭐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렇게 쉽게 재워 주는 게 많이 해 본 솜씨,라는 것이다. 아무라도 다 괜찮다는 점이 꼭 사쿠라이 선배인 줄 알았네. 그 ‘아무나’에 나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애써 잊었다. 튀어나오려는 심술을 억누르기 위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선배, 진짜 괜찮은 거예요?"

"뭐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연애도 해봤다면서 이렇게나 여자를 모르다니. 조용히 하천의 난간에 기대어 와인 병에 입을 댔다. 더 이상 아무것도 묻고 싶지 않아졌다. 와인과 함께 마른 침을 삼켰다.

 

 

 

 

 

 

다음 날, 혼자서 빅벤 주변을 관광하고 돌아왔을 때 거실 테이블 위에서 쪽지를 발견했다. 

 

「영화 보러 다녀올게.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해. 좋은 하루!」

 

쪽지 옆에는 맛있어 보이는 도넛이 놓여있었다. 허기가 져서 한 입 베어 물었다. 아주 달았다. 선배와 선배의 전 여자친구에게 인사를 하려고 기다리다 깜빡 시계가 멀어졌다.

 

 

누워서 자,

잠결에 선배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셨어요."

 

부스스하게 눈을 떠 보면 선배가 샌드위치를 내밀었다.

 

"저녁은 먹었어? 여기 내가 좋아하는 가게야."

"자는 거 아니에요. 소파 쓰실래요?”

 

샌드위치를 받아들며 물었다. 스스로도 '전 여자친구'는요? 라는 질문을 대체할 수 있을 만큼 좋은 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아니야, 그거 특대생쨩 침대잖아.”

 

본인이 말해 놓고 마음에 들었는지 선배는 네 침대, 하고 킥킥거렸다.

 

"괜찮아, 방에 있으면 되니까."

"그런데요 선배,”

 

묻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아무래도 바보같은 질문을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저 여기서 자는 거, 그분이 봐도 괜찮은 거예요?”

“아아, 어제부터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선배가 피식 웃었다. 이 사람은 정말로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섬세한 것 같으면서도 정작 필요할 때 둔한 모습을 보면 살짝 화가 치밀었다. 

 

"여자친구가 올 줄 알았다면 안 왔을 거예요. 방해하기 싫어요."

"이제 여자친구 아니라니까. 내가 지금 구남친 짓이라도 하는 거 같아?"

"그게 아니구요, 제가,"

 

나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이 이후에 내 입에서 나올 말이라고는 심술 뿐일 거란 예감밖에 들지 않았다. 

 

"방해 같은 거 아냐,”

 

선배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내 옆에 털썩 주저앉더니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었다. 

아 선배, 머리, 하고 나도 웃고 말았다.

 

"지금은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친구야. 진짜로. 예전에 내가 신세를 많이 져서 그래.”

 

선배의 눈을 쳐다봤다. 몇 번이고 강조하는 그의 눈가가 안심시키듯 빙글거리고 있었다. 왜 그런 식으로 웃는 건지 알 수 없다. 내가 안심해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그 집 샌드위치 맛있어. 일부러 들러서 사 온 거니까 먹고 자."

 

읏차, 소리를 내며 소파에서 퉁기듯 일어난 선배가 잘 자, 손을 흔들며 방 안으로 사라졌다. 

 

 

 

 

 

 

새벽에 화장실을 가려고 선배의 방 앞을 지나는데, 안에서 대화 소리가 들렸다. 

영어가 아니었다. 처음 듣는 언어가 마치 노래처럼 들렸다.

 

"뭐야... 그냥 친구라며." 

 

안심하라더니. 

물론 선배가 그렇게 말해준 적은 없었다.

나 혼자 좋을 대로 받아들였을 뿐.

 

선배와 나 사이에, 5년 전 뭔가 있었느냐고 한다면 아무것도 없었다. 서글플 만큼 아무것도. 나에겐 기분 나빠할 권리가 없었다. 이 집 주인은 선배니까 누굴 재워주든 선배의 마음이다. 그래, 선배는 의외로 연애하고 헤어지면 질척이는 타입일 지 모른다. 생각의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폭, 소리가 나도록 소파에 몸을 뉘이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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