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森重 優那

 

Heaven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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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Ⅱ

10월, 유럽은 다시 찬 공기로 가득했다. 

쨍쨍한 한여름의 두브로브니크를 종점으로 불가리아를 거쳐 루마니아까지 동쪽으로 또 동쪽으로. 끝없이 나아가던 나는 다시 이 파리로 돌아왔다. 이번에야말로 분명히, 더 자라고 성장했을 거라고 믿으며.

 

여행의 매 순간은 모험의 연속이었다. 여기에 과장은 조금도 없다. 이 모험을 움직이고 현실로 만든 내게 더 이상 동화는 필요 없다. 런던을 잊지는 못했지만, 아무래도 괜찮다는 생각도 이젠 제법 들었다. 나열할 수조차 없이 많은 사건과 사람을 만났던 반 년의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나는 어딘가 의연하고 침착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언니, 저 파리에 있으니까 돌아가기 전에 꼭 들러주세요. 친한 후배가 교환학생을 와 있다고 했다. 그녀를 만날 겸 이틀을 이 곳에서 보내기로 했다. 7월에 비하면 스산하고 춥고, 어딘가 우울하기까지 한 건조한 바람 속에서. 출국을 3일 앞둔 가을이었다.

 

la prochaine.. (다음 역은..)

 

멀리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다가 귓전을 울렸다. 문득 내 옆으로 붐비는 인파에 정신을 차렸다. 휑하니 터널에서 찬 바람이 몰아치고 열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파리의 지하철은 안내 방송을 해 주지 않는다. 런던이 쿨했다면 파리는 시크하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이미 플랫폼에서 서서 두 차례나 열차를 보낸 후였다. 

 

눈 앞에 도착한 열차의 레버를 돌리겠다고 생각하면 -파리의 지하철은 자동문이 아니라서 스스로 문을 열어야 한다- 안쪽에서 문이 열리고 꾸역꾸역 사람들을 뱉어냈다. 나오는 이와 들어가는 이가 마구 뒤섞여서, 몰아치는 인파에 휩쓸렸다. 좀, 질서라는 것 좀, 하고 불평섞인 시선을 뒤로 돌렸다.

 

 

그러면 사수자리의 별이 밝은 잿빛으로, 반짝반짝 빛이 나서 __

 

 

할 말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틀림없다.

틀렸을 리가 없다.

이번에는 틀릴 수가 없다. 

기나긴 밤의 터널을 겨우 빠져나와, 이제 살았다고 생각하면 멀리서 안아주는 달빛의 상냥함을.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은 유우나의 미소다. 

 

“유우나 군!!”

 

망설였을 것이다. 분명히 나는 몇 초도 되지 않는 그 순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멈춰섰을 것이었다. 몇 억 광년처럼 길게 느껴져서, 별이 돌고 지고 다시 태어나, 여기 돌아오기까지 그 인내의 시간들이 찰나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꿈 속에서 이미 수백번 수천번은 그를 부르는 상상을 했다. 다시 만난다면 절대로 도망가지 않는다고, 이번에는 다른 길을 ‘선택’할 거라고 간절하게 외쳤다. 그런 희망까지 남김없이 내려놓았을 때에야 비로소 찾아오는 것이다. 밤을 새며 기다린 별똥별처럼, 순식간이지만 기나긴 흔적을 남기며.

 

수많은 추억들이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빠르게, 빠르게, 마치 오래된 영사등이 넘어가듯이. 그것은 동화같은 것이 아니었다. 꿈도 아니었다. 모두 내가 만들어 온 ‘현실’. 그리고 마침내 눈 앞의 광경이 지금 이 파리에 다다랐을 때, 나는 몸을 돌렸던 것이다. 

 

더 이상 도망가지 않는다. 눈 앞을 직시하고, 선택하고 결정한다. 고작 막연한 불안 때문에 반대 방향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하면 ‘현재’가 사라진다는 것을, 지금의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렇다, 나는 현재를 사는 존재이다. 아무리 빛나보여도 과거는 과거다. 반짝거리는 나의 미래를, 과거가 아닌 ‘지금’에서 찾아야 한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의 현재는 다름 아닌, 안개꽃처럼 하얗게 빛나는 선배와의, 세 번째__

 

__ 세 번째가 있다면, 바로 지금.

우연이 겹치고 만나서 인연이 된다면, 

그런 핑계라도 와 준다면 이번에는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 

 

들어온 문을 향해서 인파의 숲을 헤집고 또 헤친다. 질서 같은 것은, 모른다. 불평하는 소리 같은 것도 모른다. 막 출발하려던 열차의 레버를 잡고 힘차게 돌렸다. 그 순간 날 짓누르는 짐, 상처의 무게, 부끄러움, 도망가고 싶다는 두려움 따위는 나와 전혀 관계없는 과거의 것이 된다. ‘지금’의 나는 그저 문 밖으로 뛰쳐 나간다. 

 

 

그러면 거기에는 틀림없이 __

 

 

“안녕”

 

 

mind the gap. 그의 입모양이 분명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았다. 이상하지. 영국의 표현은 정말 이상해. watch your step도 아니고, mind the gap* 같은 표현은 너무 웃기지. 갭 같은 것은, 그러니까 유우나와 나 사이의 공백이나 거리 같은 것은 이미 이 5년 하고도 반년, 충분히 나를 괴롭히고 또 괴롭혀서 절대 담아두지 않을 수가 없는데. 

과거를 돌지 않는 나, 도망가지 않는 나에게 이제 와 그런 말은 너무도 새삼스러운 것이다.

 

군중의 파도 속에서 그의 움직임이 멈추고, 

천천히 돌아보고, 

놀라움에 눈이 커지고,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에 뿌리박은 듯 서서,

서서히 반달 모양으로 가늘어지고, 

그렇게 눈부시게 웃으며 ‘조심해’ 라고 말하는. 

 

그런 사랑스러운 모습들이 슬라이드 조각처럼 하나하나 가슴에 새겨지는 동안에도,

나는 또 이런 바보같은 생각을 했다.

 

별의 거리를 마음에 담아두고. 

 

그리고 드디어 나는 그의 궤도로 뛰어들었다.

안녕, my London guy. 

 

 

 

*mind the gap : 영국의 지하철에서 ‘승강장과 열차 사이의 틈을 조심하라’고 쓰이는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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